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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Oct 28. 2020

Expatlife

 대학 다닐 때, 친한 친구들이랑 같이 종종 점을 보러 다녔었다. 나는 신촌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화여대 앞에는 단돈 몇천 원으로 사주와 타로카드점을 봐주는 작은 공간들이 많았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연애운을 잘 봐주기로 유명한 '퍼플레인'이라는 타로카페를 즐겨 찾아갔었고, 안정적인 남자 친구(현 남편)가 생긴 이후로는 딱히 연애운에는 관심이 없어서 삶의 전반적인 운세를 봐주는 사주카페를 즐겨 찾았다.



 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다른 역술가에게 사주를 봤는데도 늘 똑같이 얘기하던 게 있었다. 내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는 것. 신기한 것은 친구 A랑 갈 때도 "둘 다 역마살이 있네." 이러고, 친구 B랑 갈 때도 "둘 다 역마살이 있네."이러고, 친구 C랑 갈 때도 "둘 다 역마살이 있네."이랬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 나와 친구들은 '역마살이 있다는 말은 모든 손님들한테 다 얘기하는 건가보다....' 했다. 한 역술가는 우리 모두에게 역마살이 있다는 얘기가 조금 민망하셨던지 "요즘 역마살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 다들 해외로 어학연수도 한 번씩 다녀오고, 고향 땅 떠나서 공부하고 취직하고 그러니 다 역마살이 있는 셈이지." 이러셨다. 그런 식의 광범위한 역마살이라면야 현대인에겐 모두 조금씩 있겠지.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 친구 A와 B는 미국에서, 친구 C는 호주에서, 그리고 나는 유럽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끼리끼리 논다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남들에 비해서 꽤 역마살이 심하게 있는 사주였는지도 모르겠다.


 해외에서 산다는 게 꽤 외롭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경험의 폭이 넓어지는 일이니 큰 불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해외에 나와있어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찾아뵙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와야지... 하고 결심했는데, 코로나가 그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이들 겨울방학에 격리기간까지 고려해서 넉넉하게 5주 정도 한국에 있다 올까 생각해봤는데, 요즘 폴란드의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어쩌면 국경을 폐쇄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 자칫하다가는 몇 달간 그대로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변에서 그런 케이스가 몇 있었다. 환자가 늘어난 만큼 공항이나 비행기가 가장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고, 긴 비행 끝에 다시 대기하고 검사받고 격리하고.... 그 모든 절차를 생각하니 아이들 셋을 데리고 귀국행 비행기를 탈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친정집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육아를 도와주러 친정엄마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우리 집에 찾아와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내가 아직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낳았던 첫째는 거의 절반은 친정엄마가 키워주셨다. 그래서 아이들도 외할머니를 많이 찾고 그리워한다. 내가 항공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고민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아이들은 요즘 들어 외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부쩍 꿍얼댄다. 얼마 전엔 친정엄마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주들 크는 모습을 하나도 못 보네. 그게 삶의 재미인데."  해외에 살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나는 불효녀가 되고 말았다.


 역마살이 좀 심하게 낀 내 사주가 문제일까 아니면 이 악독한 바이러스가 문제일까. 가족을 보고 싶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이제는 너무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해외살이가 그렇게 서럽진 않았는데, 문득 설움이 복받치는 가을밤이다. 정말 내 사주에는 역마살이 있을까. 그냥 운명의 문제인 걸까.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을 쳐서 '객사'라든가 '역마살'이 나오면 불길하게 생각했다.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세기 이전까지는 재미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멀리 떠나는 자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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