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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15. 2020

사우나룸 노래방

 한국 친정에서 보내준 선편 소포가 석 달 하고도 열흘만에, 딱 100일 만에 우리 집에 도착했다. 두 달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지난 7월에 보냈는데 11월이 다 되어서야 받았다. EMS와는 다르게 배송추적도 되지 않고, 어디쯤 어떻게 오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혹시 분실된 건 아닌가 많이 걱정했었다. 다행히 유통기한이 딱 한 달 남은 라면 다섯 묶음과 수십 권의 책으로 가득했던 소포 상자는 무사히 우리 집 대문 앞에 안착하였다. 한 달만 더 늦게 왔으면 유통기한 지난 라면 받을 뻔...


 이번 소포 상자에는 아이들 과자, 여러 가지 먹거리, 예쁘고 섬세한 한국 액세서리, 엄마가 손수 만들어주신 가죽 가방 등등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남편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 선물은 바로 '노래방 기계'였다. 폴란드에서 단독주택에 살다 보니 인근 이웃들과 소음으로 인한 마찰이 생길 일이 전혀 없어서 남편과 우스갯말로 '우리 집에 노래방 기계 설치하면 딱이겠다.'라고 얘기했는데... 이런 우리 마음을 어찌 아시고 엄마가 딱 맞춰 가정용 노래방 기계를 보내주신 것이다.


 그런데 조그만 이 핸드 마이크가 의외로 볼륨이 짱짱하고 소리가 꽤 컸다. 그래서 노래를 하는 사람은 정말 노래방에 온 것 같은 실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대신에 한 공간에 있는 식구들의 고막은 뜻하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아이들이란.... 본인들이 부르고 싶은 '멋쟁이 토마토'나 '뽀롱뽀롱 뽀로로'를 부를 때는 신나서 마이크에 괴성을 지르더니, 엄마 아빠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면 시끄럽다고 당장 끄라고 원성을 높이는 게 아닌가. 치사하게... 


 그런데 남편이, 노래방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등쌀을 피해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노래를 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을 발견하였다. 그건 바로 우리 집 지하에 있는 사우나. 전형적인 북유럽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 우리 집 지하에는 약 1평 정도 되는 목재 사우나 룸이 있는데, 온도의 방출을 막기 위한 두터운 벽 덕분에 이곳은 의외로 방음효과가 뛰어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안에 들어가서 노래를 부르면 밖에서, 특히 생활공간이 있는 1층이나 2층에서는 개미 소리만큼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코인 노래방 같은 밀폐된 느낌은 덤. 그야말로 노래방 시스템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늑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피톤치트 향을 맡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짱짱한 에코사운드는 덤.


 정작 사우나는 청소와 관리가 힘들 것 같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면서.... 요즘 남편과 나는 사이좋게 30분씩 사우나 룸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고 나온다. 락다운 이후로 대문 밖으로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있다 보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는데, 무료했던 일상에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가 생겼다. 다른 식구들 눈치 볼 것 없이 짱짱한 사운드를 벗 삼아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연달아 부르고 나면 말로는 형언하기 힘든 상쾌함이 있다. 가끔씩 아이들도 함께 들어와 좋아하는 동요를 부르고 나간다. '로보카 폴리 주제가'라든지, '아빠 힘내세요'라든지. 2년 동안 지하실 구석에서 천덕꾸러기 공간으로 남아있단 사우나 룸이, 이제는 온 식구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혹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노래방이 그리운 분들이 계시다면, 저희 집에 놀러 오시길. 프라이빗한 코인 노래방 서비스 확실하게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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