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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가을 산책길

이토록 비현실적인 자연의 아름다움

by 주정현



바르샤바 빌라누프 궁전에서 남쪽으로 300미터쯤 걸어가면 궁전 후원과 연결된 작은 호수가 나온다. 이 호숫길을 따라 잘 정비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이 길에는 자동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 자전거, 그리고 늘 항상 만날 수 있는 백조들이 있다. 올해 가을에는 매 주말마다 이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쯤 걸었다.



코로나 락다운으로 집에만 있다 보면 잠시나마 가족들과 떨어져 숨통이 트일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스무 곡쯤 담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마스크를 쓰고 핸드폰과 이어폰만 단출하게 챙겨 집을 나선다. 잘 정비된 산책길이 논밭으로 바뀌는 포인트까지 걷다가, 다시 걸음을 되돌려 집으로 돌아오면 더도덜도말고 딱 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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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의 겁 없는 백조는 보행길 한가운데로 나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산책하다가 만나는 새가 비둘기도 참새도 아니고 백조라니. 폴란드답다. 거리로 위풍당당하게 나온 이 고고한 새를 신기하는 건 이방인인 나밖에 없다. 매 주말마다 만나지만 늘 만날 때마다 신기해서 사진으로 담아두는데, 이들을 보고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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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마법은 신기하다. 일상적으로 늘 걷던 공간을 설레게 만든다. 여름에도 스쳐 지나갔던 길인데, 여기가 예전엔 어땠더라. 길 가다 담쟁이덩굴이 예뻐서 찍고, 또 하늘이 예뻐서 사진에 담는다. 일주일을 버틸 힘을 얻기엔 사실 한 시간의 산책은 너무 짧다. 이 찰나의 감흥을 어떻게든 길게 가져가 보겠다며 핸드폰에 사진을 담고 또 담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자연이란 일부러 시간을 내야지만 닿을 수 있는 목적지다.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로부터 산의 기운을 받고, 시골길을 거닐며 땅의 기운과 흙냄새를 내 안에 가져온다.
신미경 저,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바르샤바에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도시에 살지만 자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집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가도 공원이 나온다. 자동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남쪽으로 달리면 숲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인공적인 건물이 없는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산책을 나왔는데, 황홀할 정도로 예쁜 가을 풍경을 보고 나니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다음날,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같은 산책로에 다시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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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걸어가는 식구들,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의 풍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오른다.

가을의 마법조차 주지 못했던 또 다른 설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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