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살며 느끼는 작은 균열들
모건 하우젤은 그의 책 <돈의 심리학>에서 심리학자 앵거스 캠벨의 연구를 소개하며 행복의 예측 변수는 '내 삶을 내 뜻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자기 삶을 자기가 뜻하는 대로 살고 있다는 감각.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소득도, 지리 조건도, 교육도 모두 다 행복의 예측 변수가 아니었는데, 각각의 카테고리 속에는 만성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복을 예측하는 핵심 변수는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내면의 감각이었다.
이 관점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엄마로 살아가는 삶은 분명 내가 바랐던 선택이었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이 길을 선택했다. 오래전부터 사회적 성취만큼이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 왔다. 그 일이 전통적으로 여성이 오랫동안 해 왔던 역할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 선택이 나답게 사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나는 살림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돌보는 감각을 좋아한다.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일상의 작은 변화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좋다. 그래서 엄마로 사는 일은 나에게는 애정이 담긴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결심에는 대가가 따랐다. 엄마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영역이 있었다. 나만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커리어의 방향은 이전과 달라졌다. 경제적,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역시 제한되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힘들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삶은 내가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통제감과 주도권의 상실이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라면, 이 제한들 또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지난주 금요일, 막내 아이가 갑자기 고열로 앓아누웠다. 전날 저녁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신나게 놀던 아이였는데 예고 없이 아팠다. 금요일 아침에 체온계에 찍힌 38도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는 나흘 동안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월요일까지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사이 내가 계획해 두었던 일들은 하나씩 취소되거나 미뤄졌다. 연기할 수 없는 일정은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픈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화면을 보며 일을 하는 동안, 마음은 계속 아이에게 가 있었다. 모든 것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몸도 마음도 서서히 지쳐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멈춘 건 나뿐이었다.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했고, 심지어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다른 가족들 역시 각자의 일정대로 하루를 보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만 계획을 접고 아이 곁에 머물렀다. 그 나흘 동안 나는 거의 나로 살지 못했다. 아이의 체온을 확인하고, 약을 먹이고, 잠든 숨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집안일도 엉키고 바깥일도 엉켰다. 그 모든 과정이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지만, 그 모든 과정을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억울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억울함.
아이를 향한 걱정과는 별개로, 나만 종종거리고 나만 힘들고 내 시간만 멈춰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일상의 주도권만 고스란히 박탈당한 것 같았다. 왜 나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쩌면 그 감정은 서러움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 일정은 모조리 멈춰 서는데, 남편의 일상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유독 크게 느껴졌다.
행복의 예측 변수라는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 건 분명 나였지만, 그 선택 때문에 나는 종종 내 삶을 내가 주도하고 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린다. 아이가 아픈 며칠 동안 내가 느꼈던 억울함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서 생긴 피로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시간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 내 하루의 방향이 순식간에 타인의 필요에 의해 재편된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사랑해서 기꺼이 감당하는 자리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인데 그 안에 내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는 생생하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엄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역할 속에서도 나의 선택과 리듬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
나는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다.
나는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