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묻는 열여섯에게

천양희, 그 말이 나를 삼켰다

by 주정현

시필사 3일 차. 2026. 3. 6. (금) 천양희, ‘그 말이 나를 삼켰다’ - 시집 <지독히 다행한(2021)> 중에서

[그 말이 나를 삼켰다]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 하기에
미소 짓는 이 꽃이 내일이면 진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아야 한다기에
한낮의 볕에 그늘 한뼘 들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불은 태울 수 없고 물은 물에 빠질 수 없다기에
사람이라도 좀 되어보자고 결심했다

끝없는 풍경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기에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꽃밖에 더 있을까 생각했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기에
우리가 바로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기에
붓 쥔 자는 외로워 굳센 법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갈피를 잡는 동안
그 말이 나를 삼켰다


“엄마, 서른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어젯밤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가던 시간, 열여섯 살 큰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외할머니 생신을 앞두고 할머니의 나이를 헤아리다가 자연스럽게 흘러간 대화였지요.


저는 서른이 되는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서른이 되던 그날, 산부인과 병동 응급실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셋째 임신 32주 차에 갑작스러운 진통이 느껴져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아직 어린 두 딸을 집에 있는 남편에게 맡겨두고 홀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내가 서른이 되었구나’ 하고 감상을 즐길 여유 같은 것은 없었어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10대 소녀는


"내가 읽은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그렇지 않던데- 서른을 앞둔 감상, 인생의 위기감 같은 것들을 한 챕터쯤은 너끈히 써 내려가던데."


하고 말했지만


“그런 위기‘감’ 같은 것도 사치일 때가 있어. 진짜 위기 한가운데 있으면 감상 같은 건 잘 안 생겨.”


라고 답했어요. 현실의 위기는 대개 너무 급하고, 너무 구체적이어서 그 순간을 음미할 틈을 주지 않으니까요.


삶에는 이론이 없기에 우리는 살아 보면서, 뒤늦게, 어쩌면 한참 뒤에야 그 시간을 돌아보며 우리가 바로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열여섯 살 소녀의 낭만적인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가 어젯밤 조금 깨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은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비록 한낮의 볕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그늘이, 더 오래 남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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