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는 자기 폭압이 아닌가?
오늘 아침 니체를 읽으며 카뮈의 철학이 결국 니체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했다. 니체의 통찰은 언제나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관통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적이고 아무런 관심도 의도도 없으며, 정의감도 배려도 자비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황량하고 동시에 불확실하다.
자연의 무관심 자체가 동시에 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 프리드리히 니체
이처럼 니체는 자연의 무관심하고 목적 없는 본질을 먼저 통찰했다. 이는 훗날 알베르 카뮈가 인간과 세계의 불일치, 즉 '부조리'에 철학의 초점을 맞추는 데 영향을 준 핵심 사상으로 보인다.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니체에게 깊이 빠져든다.
자연의 무관심 자체가 곧 힘이라는 니체의 통찰은 강력하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구속되거나 의존하게 됨을 의미한다. 반면 자연이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그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목적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무한한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을 무관심이라고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무관심은 때때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관심이 더 많은 쪽이 상대에게 집착하며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힘의 역학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니체가 왜 스토아 철학을 그토록 비판했는지 알 수 있다.
오,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자연에 따라서' 살기 원하는가? 그러나 '자연에 따라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 말인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에 따라 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연의 본연의 모습(무관심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에는 눈감은 채 도덕과 이성이라는 자신들의 이상을 자연의 법칙이라며 강요하는 기만적인 자들이었다.
니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외부의 불행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적으로 끊임없이 수양하고 자기 절제를 행하는 모습을 두고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하고 가혹한 독재자가 되는 행위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스토아주의를 "자신에 대한 폭압"이라 규정했다.
문득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니체 역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극복하고 넘어서서 위버멘쉬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 역시 스스로에게 행하는 폭압이 아닌가 하는 생각.
스토아 철학과 차이점이 있다면 스토아 철학이 모든 고통과 부정적인 삶의 충동들을 억누르거나 제거하려 했던 방어적인 철학이었다면 니체의 철학은 그 모든 삶의 고통을 긍정하고 활용하여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긍정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보통의 철학들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안전'을 꾀한다면, 니체는 전통적 윤리, 도덕,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수고 자유로운 창조자로서 자신의 삶을 좀 더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스스로를 폭압 하는 독재자라면, 니체의 철학은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는 자기 운명의 입법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위버멘쉬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창조적 폭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니체는 "자연의 무수한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의 삶을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는 종적인 이기주의를 강하게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가장 고등한 능력인 '이성'과 '창조성'을 최상위에 두는 인간 중심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니체는 인간에게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이다.
니체의 통찰은 깊지만 그가 인간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나에게 아직은 극단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니체는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믿고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긍정의 철학자였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그건 조금 거만하고 오만한 사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하지만 나만의 삶의 철학을 완성하는 그날까지 이 위대한 철학자의 통찰을 열린 마음으로 흡수해나가려 한다. 다음 독서에서 니체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