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거대한 세계, 그 영향력의 명암

나는 아이에게 조력자인가, 권력자인가

by selves

당연한 말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는 비단 어린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라는 존재가 한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부모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남편이 3주간 장기 출장을 떠났다. 평소 잦은 출장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유독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지금 나의 상황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조건인지 긍정적인 언어로 다독여 주셨다. 신기하게도 전화를 끊고 나자 불안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다.


대학 시절의 기억도 떠오른다. 발에 티눈이 나서 한동안 고생하던 내게 부모님은 “곧 나을 거니 걱정하지 마라”며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만 믿고 마음을 놓았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티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부모님은 내 앞에서만 괜찮은 척했을 뿐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 데려가야겠다며 뒤에서는 몹시 걱정하고 계셨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의 “괜찮다”는 한마디는 자식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한 심리적 안전장치가 된다.


이런 면에서 부모의 역할은 명확하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는 한동안 부모만을 우주로 삼고 살아간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아이에게 헌신하며 생존에 필요한 물적, 심적 자원을 제공한다. 이러한 부모의 본능과 사랑은 인류가 대를 이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필수적인 방식일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비로소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동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뜨거운 본능도 시간이 흐르며 변화를 맞는다. 자식이 완전한 의존 상태에 있는 영유아기에는 부모의 보호 본능이 가장 강하지만 아이가 성장하여 스스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그 본능은 점차 약해진다. 이는 사랑이 식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형태가 ‘생존을 위한 보호’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 보아야 한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부모가 자식을 자신과 분리된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못할 때 과거의 보호 본능은 간섭과 강요라는 독으로 변질된다. 부모는 자신의 지붕 아래 있는 자식에게 자신의 방식과 가치관을 주입하려 한다. 그것이 강압적이든 부드러운 권유든 자식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부모와 자식의 기질이 다를 경우 부모의 일방적인 기준은 자식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좋은 부모일까.

아이들을 대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나의 기준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 방식대로 주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특히 나와 성격이 판이한 첫째를 대할 때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아이의 장점을 살려주기는커녕 나의 양육 방식이 아이의 고유한 색깔마저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를 보면 선발된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를 떠나 기숙학교에서 스승과 동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소 극단적일 수 있으나 때로는 부모의 편협한 세계관 안에 갇히는 것보다 다양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더 건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숙사 생활이 하나의 선택지로 언급되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 것이다. 부모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갈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진정 아이를 위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는 더 심각한 문제도 나타난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헬리콥터 맘을 넘어 아이 앞의 장애물을 미리 제거해 버리는 ‘잔디깎이 맘’의 등장은 자녀의 자생력을 앗아가는 비극을 초래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마저 박탈시키는 양육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부모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렇기에 부모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해야 한다. 헌신과 방임, 주입과 존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아마 평생의 숙제일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 해서 나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부모’라는 역할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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