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본능이지만 우정은 태도다

완벽히 순수한 축하는 가능한가

by selves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흔히 믿어온 이 미덕에 대해 니체는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순수한 찬미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찬미는 자신도 언젠가 찬미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 선악의 저편


이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불편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믿어온 우정이나 선의가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어쩌면 니체의 말은 이런 뜻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완전히 순수하게 찬미할 수 있는 순간은 내가 그 자리에 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믿을 때뿐이라는 것.


넘볼 수 없는 신적인 존재나 영웅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순간 인간의 마음에는 비교와 질투가 따라온다. 그것은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생존과 성장을 향한 본능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괜히 생겨난 말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정은 더 복잡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원한다. 하지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실망하거나 기뻐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는 주변에서 쉽게 위로해 준다. 가벼운 도움도 기꺼이 건넨다. 그러면 우리는 감동한다. "저 사람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대가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느낄 때 인간은 동정심과 함께 어딘가 안도감이 섞인 채 선의를 베풀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짐이 되지 않는 한.


반대로 누군가가 정말 성공했을 때는 어떤가. 말로는 축하를 건네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감정, 그 안에 숨어 있는 시기와 질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실망한다. "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좋은 사람은 아니었구나."


타인의 성공 앞에서 올라오는 시기심은 사실 그 사람을 '나와 대등한 존재' 혹은 '넘어서야 할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감정은 부끄러운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여전히 비교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증거에 가깝다.


우리는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 완벽한 순수함을 기대하는 건 아닐까. 나의 기쁨을 완벽히 내 것처럼 기뻐해 줄 타인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 역시 타인의 기쁨 앞에 완벽히 순수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용기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질투는 피어난다. 그러니 나의 성공에 배 아파하는 사람을 모두 걸러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감정은 본능이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태도'라는 선택의 영역이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과 그 감정을 인정하되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타인에게 성인의 반응을 요구하지도 말고 자신에게 질투가 올라온다고 해서 과하게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것이 인간이 가진 여러 얼굴 중 하나임을 담담히 인정하는 것. 어쩌면 관계의 평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의 성취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나름의 자리까지 잘 걸어왔다는 신호일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복잡하고 때로는 비겁하며, 그래서 더 인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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