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성장하는 존재를 보며 감동할까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가

by selves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왜 감동적일까. 내 아이뿐 아니라 타인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에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곤 한다. 특히 서로 다른 나이대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그 감동은 더 선명해진다.


얼마 전 우리 지역 초, 중, 고 아이들이 함께 무대에 선 연합 콘서트를 보았다. 그 무대를 보며 나는 예상치 못한 뭉클함을 느꼈다. 초등학생의 맑은 고음부터 곧 성인이 될 고등학생들의 든든한 저음까지. 그 겹겹의 소리는 단순한 화음이 아니라 한 생명이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한눈에 펼쳐 보인 파노라마였다.


저 늠름한 고등학생들도 불과 몇 년 전엔 저렇게 작은 손을 흔들던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 건 그 안에서 요동치는 생명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과거와 고등학생의 현재가 한 화면에 중첩되는 순간, 보이지 않던 시간은 부피와 무게를 가진 실체가 되어 밀려왔다.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비로소 흐르는 시간을 눈으로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감동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요즘 기르고 있는 토마토 역시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어제보다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넓게 자신을 확장해 가는 그 몸짓을 보며 나는 기특함과 왠지 모를 생의 기운을 느낀다.


성장하는 존재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작은 변화 뒤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쌓였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동시에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생존하고 커나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생명의 에너지는 보는 이에게 강력한 생의 의지를 전염시킨다.


그래서일까. 무대를 보며 느낀 뭉클함의 정체는 단순한 찬사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동경에 가까웠다.


성인이 되고 나면 신체적 성장은 멈추고 그 자리에 나이 듦이 들어선다. 아이들의 성장이 자연의 힘이라면 성인의 성장은 철저히 의지의 영역이 된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장 대신 퇴보가 기본값이 되는 나이가 되면 힘들이지 않아도 자라는 존재가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이다. 무대 위의 아이들은 내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투쟁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생의 눈부신 관성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것이 한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방식의 성장이라는 것을.


니체는 생명이란 단순히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역동적인 에너지라 했다. 아이들의 성장은 그 힘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이다. 그러나 성인의 성장은 안으로 갈무리되는 고독한 투쟁이다. 내면의 한계를 스스로 깨뜨리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타인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오직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성장이 거스를 수 없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성장은 거친 바다 위에서 내가 직접 노를 저어 나아가는 항해다.


무대 위의 아이들이 일깨워준 생의 찬란함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극복의 의지를 건드렸다. 비록 눈에 보이는 신체적 성장은 멈췄을지라도 오늘 하루 내 안의 관성을 단 한 걸음이라도 넘어섰다면 나는 여전히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생명이다.


나는 지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잃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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