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스토리

by 국화향기

엄마가 가자미 식해 한 통 보내 주셨다. 밥알 속에 삭힌 가자미의 쫀득쫀득한 식감, 아삭아삭한 무와 매콤한 양념 맛은 잃어버린 입맛까지도 돌려놓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항상 근심거리인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김장철이 되면 엄마는 꼭 내 몫까지 챙겨 보내신다.

사실 가자미 식해는 우리 친할머니의 주특기 음식이었다. 할머니도 이맘때면 가자미 식해를 담그셨는데 그 맛이 맵고 새콤달콤하면서도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여 아버지와 나는 늘 할머니의 식해를 그리워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오랜 잔소리 끝에 오늘날 엄마의 식해가 탄생된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할머니의 식해 맛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엄마의 식해 맛과 많이 닮아 있었던 것 같다.

음식은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던 음식으로 그 사람을 떠올릴 때도 있지만, 우리 친할머니처럼 잘 만드시던 음식으로 떠올려질 때도 있다. 할머니를 떠올리는 음식에는 가자미 식해 말고 찹쌀떡도 있다. 명절날 저녁이면 음식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며느리들을 위해 우리 할머니는 미리 빻아서 쪄 둔 찹쌀 반죽을 들고 슬쩍 작은 방으로 옮겨 가셔서는 손주들과 함께 동그란 찹쌀떡을 만드셨다. 반죽 위에 팥앙금을 올리고, 동그랗게 모양을 잡아 전분 가루를 묻혀주면 할머니 표 찹쌀떡이 완성된다.

하얗게 눈이 내리던 설날 저녁 찹쌀떡 하나 입에 가득 넣고 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우리 친가의 명절에 갈 일도 별로 없지만, 할머니의 찹쌀떡과 가자미 식해는 이제 우리 친정의 명절 음식에서도 사라지고 없다.

가끔 엄마가 보내주시는 가자미 식해를 먹을 때, 수능 시즌에 빵집에 전시된 찹쌀떡을 볼 때 잠깐씩 할머니의 얼굴만 떠오를 뿐이다.

우리 엄마의 주특기는 닭개장이다.

오빠가 워낙 좋아하는 음식이다 보니 자연스레 특기가 된 것이다. 우리 엄마의 닭개장으로는 밥 한 두 공기는 그냥 뚝딱이다.

우리 시어머니의 주특기는 밥알 식혜와 돼지고기 수육이다.

명절 때마다 한 솥 가득 만드셔서 명절 끝날 때까지 주시던 식혜 덕분에 이제는 시중에 파는 캔 식혜만 보고도 우리 시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종갓집마다 내려오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종갓집 음식이라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손님 많은 종갓집의 특색에 맞는 정성과 소박함으로 담아낸 음식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음식마다 스토리가 생겨나고, 그 스토리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이제는 대중화로서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스토리로만 본다면 우리 할머니의 음식 이야기도 긴 한 편의 책으로 엮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 아버지가 어렸던 넉넉지 않던 시절, 농협 이사장이셨던 할아버지 덕분에 구정 때면 다른 집에서는 엄두도 못 낼 절편을 만드셨다. 당시에는 방앗간이 없어서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했는데 지금처럼 길고 얄팍하게 절편을 뽑아내지 못하고 둥글고 넙데데한 보름달 같은 절편을 만들어, 먹을 때 조금씩 잘라서 먹었는데 그 모양새가 “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달떡”이라 불렀다고 한다.

게다가 냉동 시설 없이 떡을 두고 먹다 보면 파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추운 마당 한편에 커다란 대야를 두고 그 속에 물과 떡을 함께 넣어 보관하며 두고두고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의 정월대보름이 되면 우리 할아버지 댁에는 하늘에 “달” 하나, 마당에 “달”하나, 달이 꼭 두 개나 떴다고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달떡을 빚을 필요가 없이 떡 제조 기술과 보관 기술이 발달되었을 때, 할머니는 지금처럼 찹쌀떡(찹쌀떡)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예전 달떡처럼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대신 우리 집엔 명절마다 여러 개의 하얀 달이 떠서 사람들의 입 속에 마다 쏙쏙 복(福) 한 개씩을 품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달 하나를 품던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스토리 있는 음식 한 가지쯤은 남겨주고 싶은데 하루하루 밥 세 끼도 끓여먹기도 힘들어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내가 만들어 준 음식에 스토리를 담기보다는 밖에서 사 먹은 음식에 스토리를 담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엄마의 자리가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진다.

더 늦기 전에 나의 밥상에도 스토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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