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이다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

by 국화향기

"평일 오후 세 시


학교 근무를 할 때 이 시간은 수업을 마치고 한창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지만, 방학 중인 요즘의 평일 오후 3시는 내게 조금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이 되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케이블 TV에서 방영하는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나의 “평일 오후 세 시”의 특별한 행적에 대해 자칫 오해할 수도 있겠다.


굳이 말하자면 그 시간에 연인을 만나는 것은 맞다.

바로 사랑하는 고3 딸아이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방학 내내 밥 먹는 시간도 쪼개가며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방학 때만이라도 도시락 배달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까닭이었다. 처음에는 고3 엄마로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매번 너무 반가워하는 딸아이를 보면 이제는 사명감 비슷한 감정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라는 독특한 제목의 조합이 불륜이라는 소재와 묘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온전히 내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세 시에 매일 도시락 배달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커피 약속이 있어도 급히 끝내고 돌아와야 하고, 개인적인 약속을 잡기도 애매해 메이게 되는 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이 뜨거운 여름에 얼마나 더운 시간대인가?

그 [평일 오후 3시]를 온전히 딸아이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 제목까지 들먹이는 까닭은 <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방학 중인 요즘 나의 일과는 밥에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난다. 식구들의 세 끼 식사를 챙기고 딸아이 도시락 배달까지 하다 보니 문득 “밥”이란 뭘까? 하는 원초적 의문과 회의가 들었다. 과연 나에게 밥이란 어떤 의미일까?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회사에 출근하는 아내에게 가난한 남편은 그녀를 위한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이 초라한 밥상 옆에 “왕후(王后)의 밥, 걸인(乞人)의 찬”이라는 메모 한 장을 남겨 놓는다. 이 밥상을 받은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것은 김소운 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의 내용이다. 이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밥”은 사랑이다.


신라의 제29대 황제인 태종무열왕 (654~661)은 하루에 쌀 3말, 꿩 9마리를 먹어치울 정도로 엄청난 대식가였다고 한다. 당시 못 먹고 못살던 민중들에게 무열왕의 “밥”은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 또는 권력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2011년부터 학교에서는 무상급식을 하게 되었다. 무상급식의 시행 근본은 차별 없는 교육 실현이라는데 있단다. 밥의 나눔을 통해 부잣집 자녀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자녀들이 '밥'을 통해 누구나 재산과 종교, 자신의 이력과 관계없이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무상급식이며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라는 거다. 밥은 평등이다.

얼마 전 인도에 다녀온 선생님에게 밥의 의미를 물어보니 대뜸 밥은 똥이란다. 주변의 똥과 오물과 가득 찬 그곳에서 밥을 먹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을 무렵 밥이 결국 똥이란 생각이 들더란다. 소유의 의미로 “밥”이 그곳에서는 결국 “무소유” 였단 말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 두 살 터울의 오빠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넌 내 밥이야.” 난 오빠에게 만만한 존재, 즉 최후의 보류였던 셈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밥은 단순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밥은 지친 학업에 대한 휴식이었다

대학 시절 집 떠나 타지 생활에서의 밥은 그리움이었고

그 후 두 아이 엄마인 나에게 밥은 부모로서 의무가 되었다.

아이들 밥을 주고 나니 밥솥에 밥이 똑 떨어졌다. 주부 경력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밥양을 조절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나도 이제 뭔가 먹어 볼까 냉장고를 보니 어제 남은 찬밥이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다.

전자렌지에 돌려 김치를 찬 삼아 한술 뜨려는데, 문뜩 엄마 생각이 난다….

처녀 시절 군살을 뺀다고 밥그릇에 떠 준 밥을 꼭 반 이상 남겼었다. 그 남은 밥을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처량하게 드셨겠지….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얘들이 남긴 밥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버리라고 하신다.

밥은 엄마다.


찬밥을 먹고 있는 내 모습에 엄마가 있다.

엄마도 오늘의 나처럼 다들 먹고 떠난 빈 식탁에 앉아 찬밥을 비우고 계셨다.

엄마는 그렇게 늘 밥이었다. 엄마의 희생이 나에게는 즐거움, 휴식, 그리움이 되었다.

이제 나도 밥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도 최후의 보루, 안식처이다.

그런데 내 밥은 가끔 죽도 되고, 된밥도 되어 심통을 부린다.

저녁상을 차리니, 이런 엄마의 심통을 알아챘는지 아들 녀석이

“엄마 음식 솜씨는 항상 최고예요.”라고 제 어미를 추켜세운다.

그래 나는 밥이다.

휴~ 내일 아침에는 뭘 해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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