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시간이 있을 때 핸드폰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영화 보기를 즐겨한다. 개봉 시기가 조금 지난 작품이나 좀 더 오래전에 제작된 작품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꽤 볼 만한 작품들이 많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며칠 전에도 영화를 한 편 볼까 하고 들어갔더니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신은경 주연, 임권택 감독의 1997년 작 “창”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사창가 윤락녀의 삶을 사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이 눈길을 끈 이유는 이 영화가 19금이라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997년은 그러니까. 이때는 내가 강원도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의 해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교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를 안 한 탓인지 나는 시골 탄광촌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데 담임교사라고 꽤 점잔을 떨며 아이들 앞에 섰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기억도 있고, 가르침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단언컨대 열정만은 내 교직 인생에서 최고였던 시기일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을 하던 어느 날, 하루는 한 아이가 와서 동네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자랑을 하였다. 신은경이 나온단다.
“예쁘니?? 어디서 찍는데? 무슨 내용이래?”
철없던 나는 진심으로 영화를 찍는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 다그치듯 물었던 것 같다. 그러니 아이가 내 반응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배우니까 예쁘지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다 찍고 간대요. 이따 아이들이랑 다시 찍는 거 보러 갈 거예요. 선생님도 한 번 가 보세요.”
“어휴 선생님이 어떻게 거기에 가니? 너나 많이 보고 오렴.”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들이나 마을 사람들의 눈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그 영화가 바로 “창”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것이 19금 영화인지도 몰랐다. 막상 개봉하고 나서 보니 19금 영화였고, 당시 포스터에서 풍기는 에로틱함이 너무 강렬하고 부끄러워 영화관에 차마 보러 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였다. 단지 고작 5학년밖에 안 된 아이에게 무얼 찍는지, 어떤 내용인지 등등 물어보며 영화 찍는 현장에 가 보고 싶어 했던 철없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한동안 창피하고 괴로워했었다.
어찌 되었든 바로 그 영화를 발견했으니 내 호기심이 동(動)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번에도 끈질기게 영화의 처음과 끝을 차분히 보지는 못하였다. 나의 관심은 영화의 내용보다는 배경이 되는 사북, 고한의 옛 모습에 쏠려 있었다. 내가 아는 곳이 나오지나 않을까 또는 혹시 영화 찍는 것을 보러 간다던 그 녀석이 카메라 앵글에 잡혀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내내 배경이 되는 장면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배경은 그야말로 배경일뿐이므로 화면 속의 모습으로 당시를 추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만, 영화의 내용을 보니 왜 그곳에서 영화를 찍게 되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 영화의 내용처럼 윤락녀로 전락해 가는 주인공의 삶과 탄광촌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삶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상징하기에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조합이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나에게 사북은 그리 삶의 끝자락을 상징할 만큼 비참한 곳이 아니었다. 영화 “창”은 임권택이라는 거장 감독의 영화답게 다양한 사회 문제를 영화 곳곳에 담아내며 19금 영화의 낯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지하게 여주인공의 삶을 그려낸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첫 발령지이며 나름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 회색빛, 삶의 막장이 되는 장소로 그려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 기억 속의 사북읍(舍北邑)은 거친 탄가루 속에서 더욱 빛나던 아이들의 미소가 기억되던 곳이었다. 서툰 새내기 교사였지만 열정만큼은 넘쳤던 시기였던지라 아이들과도 함께 참 많은 활동을 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갈고닦은 실력으로 가야금 단도 만들어서 지역 축제에 참여하기도 했고, 반 아이들과 함께 리듬 합주단도 만들어서 학예회 무대에도 서 보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방과 후에 아이들과 캠페인 활동을 벌이다가 교장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일…. 등등 그러니 어떻게 아이들에게서 어두운 색깔을 볼 수 있었겠는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도 어쩌면 거기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창”으로부터 소환된 빛나던 사북읍(舍北邑)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
여러 가지를 떠올리다 보니 문득 그 옛날 학교 소식이 궁금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학교 이름을 치고 들어갔더니 홈피 주소가 나와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몇 번을 시도해도 접속이 안 되었다. 다시 학교명으로 검색을 하다 보니 2013년 2월 28일 자로 폐교가 되어 인근 초등학교와 통폐합이 되었다는 기사가 보였다. 서운한 마음이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졸업생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많은 일을 겪었던 곳이고, 강원도의 짧은 교직 생활 동안을 몸담았던 곳이라 서운한 감정이 더욱 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