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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Jul 05. 2015

'그리스 신화'로 남을 사내, 치프라스

낯선 남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끼다.

재신임을 묻겠다

2003년 10월 10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측근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한 얘기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방식의 선언을 직접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이나 주변 어른들께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반응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게 뭐냐, 하다하다 별 짓 다 한다"

그처럼 '초강수'를 두며 국민 앞에 선 배경에는 복잡한 일들이 많겠죠.

혹자가 말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타고난 승부사 기질도 있을 것이고.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국면 전환용 카드일 수도 있겠고.

다만, 많은 이들이 그 당시 얘기를 하면 빠지지 않는 얘기가 있습니다.

"참여정부의 기반이 흔들린 사건이었다"

앞선 어떤 정권보다도 깨끗하고, 부정부패 없는 5년을 만들겠다는 참여정부의 기치가

측근 비리라는 '한 방'에 쓰러질 수 있는 상황.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면 돌파를 선택했습니다.


국민투표에 부친다

거의 12년 만에 느끼는 기시감이었습니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채권단의 긴축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예상 밖의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시장 전문가들은 그리스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치프라스의 선언 이후, 언론 보도나 주변 기자들, 경제 전문가들의 반응은 대개 이랬습니다.


"저게 뭐냐,  국민투표해봐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치프라스가 '깜짝 초강수'를 들고 나온 배경에도 복잡한 일들이 많을 겁니다.

짙은 눈썹과 젊은 나이를 고려할 때 짐작할 수 있는 고집스러움

꿈쩍도 하지 않는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한 극약 처방

다만, 많은 이들이 이번 국민투표의 배경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시리자 정권은 서민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언론에서 흔히 '급진좌파'로 표현하기도 하는 시리자당의 당수 치프라스는

앞선 정권에서 받은 구제금융으로 인해 그리스 시민들의 삶이 쪼그라드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내세운 인물입니다.

그런 정권의 기치가 또 한 번의 긴축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채권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치프라스 총리도 12년 전 한국의 노무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노무현의 재신임과 치프라스의 국민투표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측근 비리와 추가 긴축은 애초부터 다른 성질의 원인이고.

사안이 진행되는 방식,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여파 등등 차이점을 찾기 시작하면 같은 선상에 놓고 있는 것이 무안할 정돕니다.


그럼에도 노무현과 치프라스가 왠지 닮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가여울만큼, 자신의 모토에 충실하다는 점일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 만큼은 국민들에게 약속한다"

국민에 의해 탄생한 모든 정부가 '이것'을 가지고 있고, 많은 정치가가 '이것'을 끝까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는 정부가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누가 봐도 치명타를 입어 정당성이 훼손된 정부라도, 제 발로 국민의 뜻에 따라 권좌에서 내려오겠다는 대통령은 참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은 참신했고, 충격이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됐건, 자신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지키지 못했다면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 그 자체 였던 것이죠. 적어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금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는

정권을 쥐며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서민들의 주머니를 쥐어 짜서 채권단 빚을 갚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라는 '이것'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치프라스가 세계 여러 정권들이 즐겨 썼던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며

"어쩔 수 없다. 망하는 것 보다는 이게 낫지 않으냐. 조금만 참아 달라"

고 해도, 그가 100% 틀린 선택을 했다며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을 없을 겁니다.

물론, 총리직도 유지할 수 있겠죠.

치프라스의 국민투표는, 그래서 더 정치적으로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물러나도 관계없다. 하지만 나를 믿고 따라준 수많은 국민들에게 한 약속은 어길 수 없다'는 책임 있는 자세.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낄 겁니다.

적어도, 혹독한 실업률과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그리스의 젊은 세대와 연금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노인들에겐 말이죠.


재신임 선언 이후 탄핵 정국과 총선을 치르며 위기를 돌파한 노무현 정부는 5년 임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일을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장 기억에 남고, 다시 보고 싶은 대통령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며 권좌에서 내려올 것을 시사한 '노짱'의 모습을 대한민국의 절반을 차지한 젊은 세대들은 아직도 '신화'처럼 기억하고 있는 거겠죠.


이제 치프라스에게도 국민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국민투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결과 따라 그리스 경제가 어떤 흐름을 보일지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도, 제 생각도 "알 수 없다"로 모아집니다.

어쩌면 치프라스 총리는 '협상안 찬성'에 밀려 단명한 총리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협상안 반대'로 결정되면 그리스 사태가 유럽 연합 해체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 옳은 방향인지는 판단이 어려운 문젭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경제 석학들이 판단한 내용이 교과서에 실리게 되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치프라스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는 쪽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경제만 아니면 돼'라고 할까요.

다만, 저는 그리스의 젊은 총리를 보면서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자기가 한 약속을 벼랑 끝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총리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적어도 그리스의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이런 '그리스 신화'를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들려주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시대 '노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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