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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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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Jul 05. 2015

15년 전 나를 만나다.

'낯섦'이 익숙했던 시절

"여기서 타는 거 맞아? 여기 아무도 없는데?"

미처 다 뿜지 못한 담배 연기를 코로 흘려보내며 환승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남자의 음성이 스쳤다.

나이는 대략 스무살 정도? 아니 그것도 못되는 것 같다. 깡마른 몸매에 어설픈 핏의 청바지, 백팩을 곳추세워 맨 모습이 영락 없는 고교생이다.

그렇지. 여긴 아무도 없지.

방금 도착한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이미 버스 정류장에 자리를 잡았거나, 아침에 세워둔 자가용에 시동을 걸고 있을 시간이다.

게다가 여긴 열차를 타는 곳이 아니야.

환승주차장을 조금만 둘러보면 여기 저기에 역으로 통하는 통로가 3층에 있다고 쓰여 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면 저 멀리서 출입문을 닫겠다는 기관사의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단 말야.

역시 어린 건가.

아마 처음 이 곳에 온 모양이다. 저 즈음 되는 시절에는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어딘가 처음 가보는 곳에 홀로 남겨지면.


15년 전,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라는 것이 강변역에 처음 생겼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나는 요즘 말로 '썸'을 타고 있던 여자 친구와 영화관 '구경'을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호기롭게 가자고 했던게 화근이었는지, 약속 날짜가 다가올 수록 불안해서 못 견디겠는거다.

문제인즉, 나는 강변역까지 가본 일도 없을 뿐더러,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는 것.

하릴 없이 손톱만 물어뜯던 열아홉 나는, 토요일 저녁 약속이었지만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강변역에는 사람도 많고, 출구도 여러개였다.

그때만해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그런 게 없었던터라, 나는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래서 맞닥뜨린 곳이 동서울 터미널. 멀티플렉스에 가본 적은 없었는지 몰라도 당연히 영화관이지 고속버스를 타는 곳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식은 땀이 났다.

'어딘지 모를때는 택시를 타라'는 외삼촌 말이 생각났다. 마침 택시는 터미널 앞에 줄을 지어 있다.

"아저씨, 테크노마트 가주세요"

두터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있던 기사 할아버지는 콧잔등을 누르고 있는 안경 너머로 나를 한참동안 말없이 쳐다봤다.

"아~ 진짜. 깜빡 잠들어서 잘못 내렸네"

일부러 기사 할아버지 들으라는 식으로 너스레를 떨며 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피했던 것 같다.

기사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곧바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물론, 미터기도 찍지 않은 채로.

차는 좌회전 신호 한 번 걸리지 않고 강변역을 끼고 반바퀴 돌아 테크노마트 앞에 섰다.

"다 왔어. 학생, 여기 처음 왔구먼"

기본 요금도 찍히지 않은 미터기를 보며 허둥지둥대는 내게 기사 할아버지는 그냥 내려도 좋다고 했다.

다음부터 여기는 걸어서 댕겨! 라며 헤시시 웃는 백발 노인이 그 때는 참 기분 나빴던 것 같다.


그 땐 정말 그랬다.

수능은 끝났고, 썸녀는 있고, 나는 공부말고는 뭐하나 야무지게 해본 적이 없고.

카페라는 데는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놀아봤다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러 다녔다.

동대문에 가서 어느 쇼핑몰 몇 층에 가야 '잘 나가는' 애들처럼 입을 수 있는지 수소문했다.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 본 일도 별로 없어서 지하철이 어디에 떨궈주든 서울역 도착한 촌놈마냥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곳이나 나가버리곤 했다.

하루하루가 첫 경험이었고, 모든 순간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소름이 끼치도록 신기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점심 식사 후에 스타벅스에 앉아 깔깔대는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다.

동대문은 와이프가 아기 옷감을 살 때나 가는 곳이 됐고, 옷은 대형 쇼핑몰에서 '내 멋대로' 사 입는다.

모르는 동네에 가면 여긴 왜 이정표 하나 제대로 없나며 투덜대며 편의점 청년에게 빙긋 미소를 날리며 길을 묻는, 나는 이미 아저씨가 되어 있다.

어떤 걸 해도 귀찮거나 짜증이 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 피곤에 찌든 직장인이다.


"아 뭐야, 반대편에 있었네. 잘 가르쳐줘야지 X신아!"

멀리 등 뒤에서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지하철 타는 곳을 찾은 모양이다.

신호도 없는 건널목에서 좌우를 살피며 후다닥, 뛰어가는 저 모습에 15년 전 테크노마트 앞 택시에서 내리며 얼굴을 붉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어, 지금 역 도착했어. 금방 들어갈게"

저녁 밥상을 차리고 있다는 아내에게 20분 안에 도착할거라고 안심을 시키며, 나는

15년 전 모든게 새롭고 즐거웠던 나와

오늘 또 한번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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