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산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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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는 흔히 무덤을 산속 깊은 곳에 뒀다. 삶 가까이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을 두렵고 불길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에선 묘를 '산'이라 부르기 때문에 성묘를 갈 때도 ‘산에 간다.'라고 했다. 묘 주변으로 현무암 쌓은걸 ‘산담’이라 했다. 육지 사람이 제주에 와서 이질감을 갖는 것 중 하나가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무덤일 것이다.
제주에서도 촌으로 이사를 간 때문도 있겠지만 아이가 다니는 '작은 학교' 입구에는 돌무덤과 비석이 줄지어 있었다. '애들 다니는 학교 정문에 무덤이 있다고?' 처음 도시에서 왔을 때만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밭 가운데에도 오름의 능선 자락에도 무덤이 있다는 것이 무척 생경하기만 했다.
'밭주인이 돌아가시면 그 밭에 모시는 건가? 자손들은 거기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하지만 밭에 무덤을 쓰는 경우는 풍수사가 돌아가신 분의 사주팔자와 풍수지리를 보고 정해준 곳에 무덤을 쓴 것인데 그곳이 남의 밭이여도 시신을 모셔 묫자리를 우선 쓰고 나중에 밭주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고 대가를 정했다고 했다. 공동체 성격이 강한 제주도 문화에서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었다. (가끔, 제주에서도 돌담 없이 그냥 봉분만 있는 묘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말의 묘라고 했다. ) 우도에 갔을 때 나는 처음 보았다.
제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는 경계라곤 묘를 둘러싼 돌담뿐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이가 없으니 먼저 간 이의 '산담'이 무서울 것도 불길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이해하자 산책 길에 만나는 산 담도 더 이상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가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는 이 땅이 참 좋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 있었다. 보통 그 길을 따라 왕복 10킬로 정도를 걷는데, 중간쯤에 도로가 좁아지는 지점이 있었다. 그곳에 묘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도로 구획이 바뀌면서 원래 있던 묘지 앞까지 도로가 난 것 같았다.
자손이 성묘라도 온다면 차도 옆 자전거 도로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묘 주변에 잡초가 무성했고 산담이라 할 돌담도 있는 듯 없는 듯 엉성할뿐였다. 얼핏 봐서는 관리가 안 되는 무연고 묘처럼 보였다.
어느 날부터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앞을 오갈 때마다 나는 낯선 이의 묘 앞에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그분의 복을 빌었다. 가끔은 그 곁에 가만히 서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곤 했다. 서울 토박이인 내가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상상도 안 해봤을 일이지만 제주에서는 달랐다. 다양한 삶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내 세계를 넓힐 뿐 아니라 서로를 덜 외롭게 하는 일이었다. 제주의 바람과 파도가 드세고 험하다 하지만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받은 인간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죽은 이 마저 너무 멀리 보내지 않고
곁에 두고 품어주는 제주는 참 따뜻한 곳이 맞았다.
혹시, 제주 여행길에 '산담'을 만나게 된다면, 이젠 가볍게 인사를 건네보길 권한다. 내딛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