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안정감

by 은수

초등학교 앞 100년도 더 된 팽나무도 한번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 웃음소리, 수업 종소리가 사라진 3월이라니. 아이들이 몇 명이나 올라가 앉아도 끄덕 없이 품어주던 팽나무였지만 그 해, 더 이상 팽나무를 타고 오르는 아이는 없었다.


도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경험한 작은 마을의 일상은 마치 디지털 문명이 덮치기 전인 과거 어느 시간쯤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곤 했다. 상대적으로 학원 다닐 일이 적은 마을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도 운동장에 남아 친구와 늦도록 놀거나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하고 놀다 저녁까지 먹기 일쑤였다.


잠옷차림으로 엄마가 전해주라는 반찬을 들고 친구집으로 오르내렸고, 반찬을 가지고 와서는 그대로 더 놀다 가거나, 반찬 심부름을 가서는 놀다가 돌아왔다. 그러고도 헤어지지 못하는 날은 친구집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 이런 식 공동육아가 당연한 듯 이어지는 곳이 작은 시골 마을의 일상이기도 했다.


인간사가 그렇듯 그런 구조의 관계는 누구에겐 따뜻했을 테고, 다른 어떤 이는 더 외로울 수 있었다. 가끔은 위험하기도 했는데, 마을에 독감 환자라도 생기면 급속히 번지는 일이 빈번했다.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바이러스의 전염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관광지인 탓에 코로나19가 제주도 작은 마을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을에 처음 코로나 환자가 생겼을 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더없이 따뜻했던 유대 관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마을도 익숙한 일상의 틀을 바꾸고 각자의 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나 역시 곧 끝날 거라고만 생각했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도 양면은 있었기 때문에,들이닥친 역병에 모두가 걸어 잠근 문은 '뜻밖의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다가올 암울한 미래도 알지 못한 채 읽고 싶던 책을 잔뜩 쌓아놓고 여유를 즐기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 해, 결국 학교 문은 열리지 못했고, 보호자가 학교로 가서 온라인 과제물만 주기적으로 받아 올 뿐이었다. 사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작은 마을에서의 내 삶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가르치는 아이 부모 90%가 펜션과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였기 때문에 코로나 19의 타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못 가는 마당에 글쓰기 학원을 다닌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일이었다. 함께 읽고 쓰던 아이들 대부분이 빠졌고, 지난 몇 년간 한정된 작은 마을에서 '글쓰기 교실' 수입으로 생계를 꾸리던 내 생활도 큰 반전을 맞게 됐다. 그곳에는 애초에 불로소득이란 10원도 존재할 수 없는 '노동하는 사람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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