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없어도!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에겐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계를 걱정할 일 없이 '사유' 할 수 있는 500파운드는 곧 능력이며, 자물쇠를 단 방은 홀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의 힘'을 의미하는 상징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이에게 더없이 부러울 조건이지만, 글을 쓰기 위한 이상적인 환경이 갖춰지기를 기다려서는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말 일이었다.
지난 일 년째 내 방이 없는 나는 거실에서 글을 쓴다. 엄밀히 말해 큰딸에게 내 방을 임대했다. 캐나다에서 로스쿨 과정을 마친 딸은 지난여름 나에게 왔고, 이번 8월 변호사 연수 시작 전까지 집에 머물며 일하고 있다.
이미 성인이며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딸은 내게 300만 원을 냈고, 14개월 임대 조건이었다. 숙박과 식사, 세탁은 물론 간혹 걱정과 염려를 담은, 엄마라면 당연한 사랑을 주면서도 돈을 받았으니 내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홀로 사유할 공간'을 임대로 내놓은 상태가 됐다.
그런 연유로 내가 글 쓰는 공간은 거실이고,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밥상이 차려졌다 치워지면 거기서 다시 글을 쓴다. 아이 셋이 화장실이든 주방, 베란다를 오갈 때 거쳐가는 통로에 앉아 글을 쓰는 셈이다. 간혹 독서실 총무가 된 상상을 하거나 세 아이가 번갈아 오가며 맞은편에 앉아 각자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갈 때는 24시간 민원 창구나 상담실 직원 같다고 생각하면 조금 재밌다. 해야 될 업무를 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보람이 따라왔다.
그 외, 아이들이 말을 걸어올 때가 아니면 나는 대부분 '3M 소프트 귀마개'로 귓속을 꽉 막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방해되는 상황이 아니고선 별문제 없이 글을 쓸 수 있다.
귀마개를 귀에 꽂는 순간, 나는 자물쇠를 단 방에 홀로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쓰는 시간의 물리적 결핍은 집중력을 더욱 높여 주었다. 쌀을 씻어 가스 불을 켜고 밥이 익는 동안 문단 하나를 만들자고 생각하면 집중력은 배가 됐다. 세탁기가 열심히 빨래를 돌리는 동안 '초고'까지 완성하자고 해놓으면 곧바로 마감을 앞둔 마음이 되어 글에 속도가 붙는다.
나는 모두의 방에서 글을 쓴다. 내내 얌전하던 개와 고양이가 밤이 되면 갑자기 서로를 잡으러 다니며 추격전이 벌어진다. 2년 전 고관절 수술을 한 치와와 ‘원두’가 고관절이 없는 아이라곤 믿기지 않게 맹렬히 달려서 ‘라떼’를 쫓기 시작했다. 고양이 라떼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로 날아올라 글 쓰고 있던 내 노트북 키보드 위를 거침없이 밟은 뒤, 건너편 소파로 날아갔다.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트북 화면에 ㅋㅋㅋㅋㅋ을 길게도 쓰고 달아났지만 난 괘념치 않으며,
그저 매일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