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거나 혹은 못쓰거나
앞선 어느 세대보다 고학력자가 많은 요즘에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상은 당연할지 모른다. 몇 가지 문종의 '작법'만 해도 중,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대부분 경험할 수 있고, 대학은 물론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쳤다면 다양한 문서 작성과 작법의 기본기를 습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높은 자의식에 비해 자기주장이 빈약한 원고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선생님, 제가 정말 숙제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요."
토요일, 성인반 수업이었다. 지난 시간에 내가 한 가지 숙제를 냈었는데 꽤나 성실한 그녀는 빈 노트만 들고 와 구구절절한 사연부터 내놓았다. 20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몇 달 전 복직 한 그녀의 일상을 직접 보지 않았다고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앞에서 빈 노트를 꼭 끌어안고 몹시 죄송한 학생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떤 글을 쓰기에 앞서 자주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야기의 근거 제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료기 때문이고, 준비된 자료 안에서 우린 더 자신감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통계되고 문서화된 자료만으로 쓸 수 있는 글은 형식의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반면 몸에 새긴 경험은 어떤 데이터보다도 '날 것'의 살아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온몸에다 경험을 새겨 넣으며 어느 때보다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다. 글로 쓰지 않았다고 쓴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엄마 입장도 처음 됐고, 시부모님과 아래 위층에 사는 며느리의 삶도 경험 중이다. 육아 휴직 후 얼마 전 복귀한 직장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며 적응 중이었다. 지금 그녀는 '약자'로 사는 삶을 톡톡히 경험하며 온몸으로 쓰는 중이었다. 몸으로 써 본 사람이 캐낸 공감과 이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아는 만큼 나는 그녀가 숙제를 안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몸으로 쓰는 시간'은 일상에서 마주한 한계를 드러내 우리를 좌절케도 했지만, 그 절망감을 이해하고자 마음을 뒤척인 시간은 '나'에게 '나'를 데려다주었다. 자신과 반갑게 만난 이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글은, 덜 흔들릴 때 쓰면 될 일이었다.
우린 한동안 수업시간에 '소리'를 모았었다. 그녀는 주로 사무실에서 듣는 소리를 모아 왔는데,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전화소리 나 회의 중 지시사항에 대답 대신 필기하는 볼펜 소리와 스테이플러의 딸깍이는 소리도 있었다. 바쁜 중에도 나를 둘러싼 소리를 모으며 감각을 잃지 말자는 의미의 시도였다. 지난 시간엔 모아 둔 소리에 '사유'를 담은 문장 만들기를 시작했는데, 단어가 문장이 됐을 때 그다음을 기대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입혀지는 '경험'의 옷에 첫 단추 꿸 마음을 만들었다면 이번엔 제대로 응시해 보자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지금 몸으로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더욱 단단해질 그녀의 시간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였다. 오늘 당장 글을 쓰지 못하는 날엔,
몸으로 쓰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