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떼어 낼 수만 있다면!
시냇물이 흘러 강을 만난 것처럼,
문장은 모여 문단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쓰고 있던 단편 소설에 십여 개의 문단을 만든 상태였고, 만든 문단을 징검다리 삼아 부단히 마음을 옮겨 다녔다. 그때만 해도 좀 더 나은 글이 되어 큰 물을 만날 기대에 들뜬 것 말고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갈등이 없다면 이야기가 될 수도 없었다.
소설 속 문단은 분명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온 단어의 조합이었는데 유독 마음이 가는 문장과 문단이 생긴 게 문제였다. 편애하는 마음은 시야를 무척 좁게 만들었다. 하필 내가 좋아한 문단은 물 위의 기름처럼 소설 속에 섞이지 못했고 상황이 그럼에도 나는 그 문단을 제외시키고는 더 이상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뒤에 냉정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고, '균형' 같은 실용적인 단어가 눈에 들어 올리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객관적이고 더 따끔한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삶은 좀 더 건설적인 모습으로 달라졌을까? 내가 편애한 문단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았지만, 글의 전체 흐름과 균형을 생각한다면 도려내야 했다.
결단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갖고 싶던 나는 프린트된 80매 단편 소설의 문단을 가위로 잘랐다. 순서대로 번호를 붙인 십 여개나 이십여 개로 잘린 문단을 넓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마우스를 움직여 얼마든지 문단의 배치를 바꿀 수 있지만 마지막 기회니 만큼 좀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었다.
마음을 빼앗긴 문단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이야기 재배치를 시도했다. 더 매끄럽게 연결되는 문단끼리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재 배치 해봐도 여전히 눈에 밟히던 애착 문단을 결국 떼내려니 나는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픈 지경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문단을 떼냈을 때 글은 더 짜임새를 갖췄다. 미약하나마 글이 성장한 시기를 되돌아보면 더 잘 떼어 낼 수 있을 때였음을 알 수 있었다. 떼어낸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과 닮았다. 사람도 성장하는 과정에 많은 실수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수 자체보다 실수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더 나아지겠다는 다짐을 데려 오기 때문에 나아지기 위해 인정한 사람은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가위로 문단 나눈 일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 행위가 담고 있던 그 시간의 열정 때문이었다. 결국, 글쓰기는 덜어내는 일이었고 수없이 인정하고 깨지는 과정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과 매우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