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쓰는 시간’
글 쓰는 시간으로 가는 길엔 지름길이 없다. 조금씩 당겨 앉으려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처럼 성큼 걸어갈 수가 없고 길은 멀기만 해서 자주 아득했다.
지난 연재에 언급한 것처럼 '몸으로 쓰는 시간'이 있다면 그다음은 '말로 쓰는 시간' 일 것이다. '글로 쓰는 시간'으로 가는 길이 하도 멀고 복잡해서 도대체 내가 '글로 쓸 수는 있을까?' 숱하게 낙담했었다.
‘몸으로 쓰는 시간'은 대부분 억울하고 비참한 경험이 응축된 시간이었다. 그 경험을 몸에 새긴 마음엔 슬픔이 담겼고 어쩌면 슬픔 때문에 우리는 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숲 가운데 있을 때 숲 전체를 볼 수 없듯, 내가 슬픔 자체일 때는 객관적으로 슬픔을 응시할 수가 없다. 그때 쓰는 글은 왜곡되거나 편협해지기 쉬웠다.
말로 쓸 때 기억은 선명해졌고 자유롭게 시점을 달리 할 수 있었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머릿속에서 꺼내놓지 못해 궁리만 하던 것도 말로 할 때 정리됐다. 자연스럽게 사고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과정은 마치 글쓰기에서 문단을 가르고 나누고 떼내는 과정과 비슷했다.
다행히도 나에겐 ‘말로 쓰는 시간'을 지켜주던 이들이 있었다. 아무나 붙들고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꽤나 한정된 친구와만 가능한 시간였고 실제로 도움 받은 나에겐 귀한 시간이었지만, 그 당시 그들은 꽤나 힘들었겠다는 것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됐다. (몹시 미안한 기억이다)
안 쓰거나 혹은 못쓰고 있을 때 열심히 '몸으로 쓰는 시간'을 가졌다면 ‘말로 쓰는 시간'을 가져 보길 권해본다. 그때 비슷한 책을 읽고 대화할 수 있는 '문우'가 있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슬픔을 가진이는 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슬프기 때문에 쓰려는 것이다. 쓰는 시간으로 가는 길엔 지름길이 없고, 포기할 수도 없을 때 우린 그저,
어제 보다 조금 더
당겨 앉아 부단히 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