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되고 포장되던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사르트르
돌봄은 타자를 위한 헌신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 자신을 확인하는 가장 강렬한 방식이었다. 한 존재를 돌보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를 살게 했으므로, 돌봄은 쉽게 중독됐다.
양육자는 아이의 필요를 통해 부모로의 효능감을 얻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증명했다. 울던 아이를 달래고 다시 고요가 찾아오는 순간, 그 질서의 회복 속에서 나는 주체이자 의미 있는 존재가 됐다. 하지만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희미해졌고, 그 자리에는 ‘돌보는 자’만이 남았다. 결국, 돌봄의 피로보다 무서운 것은 돌봄이 끝났을 때 찾아오는 공허였다.
흔히, 빈둥지라 일컫는 허전함은 단순히 자식이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였던 시간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됐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더 이상 내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나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삶이 유한하듯 양육자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난다.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날려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남겨진 곳이 ‘빈 둥지’라 불리는 데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곳은 공허한 껍데기가 남은 자리가 아니라, 잃어버렸던 자신을 돌볼 곳이다. 떠난 것들과 남겨진 나 사이의 역사는 결코 헛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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