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
관계란 서로에게 부재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지난 토요일은 은이, 진이와의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나는 아이들 편에 들려 보낼 수업 자료와 책을 챙기고, 작은 케이크 두 개와 내가 만든 빵도 준비했다. 편지는 필사 수업을 했던 어린 왕자 책 맨 뒷장에 써두었다.
은과 진에게
왜 하필 어린 왕자였을까?
우리가 필사를 하고, 온 책 읽기로 마음을 나눈 책이 말이야.
초등학생이던 너희가 이제 고등학생이 될 동안 우린 함께 했어. 돌아보니, 그 시간은 우리가 서로를 길들인 시간이었구나. 어린 왕자와 장미, 여우가 그런 것처럼 말이야.
이제 한동안 선생님은 여우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가 오던 주말, 그 시간이 되면 너희들을 떠올리겠지.
(중략)
고등학교에 가서도 결국 잘 해낼 거라 믿어.
언제 어디서나 늘 자신과의 대화를 잊지 않길 바란다.
결국, 모든 해답은 너희가 갖고 있으니까 말이야.
성실한 모습으로 성장한 너희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참 영광이었어!
앞으로도 너희의 힘찬 발걸음을 응원할게. 고민이 있을 땐 언제든 연락하렴.
-은수-
편지를 적고 난 마음은 어쩐지 후련하면서 슬펐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일주일 동안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얼마 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왔던 터라 할 말이 더 많았다. 우린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마지막 수업을 마쳤고, 아이들도 내게 편지를 써주었다. 우린, 부끄러우니까 편지는 나중에 집에서 혼자 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현관을 나서기 전에, 나에게 와 차례로 안겼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또래에 비해 유독 체구가 작던 아이들이 어느새 키가 170이 넘는 소녀들이 된 바람에 모양새는 내가 안긴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조용해진 교실 소파에 앉아 아이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읽었다.
선생님! 어느새 5년이란 시간이 지났어요.
사실 선생님께 쓰는 편지라 그런가 서론, 본론, 결론을 나눠서 써야 될 것 같아요.ㅎㅎ
(중략)
저는 선생님과의 수업을 통해 많은 걸 배웠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넓어졌고요.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셨던 저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어요.
저희는 일주일 동안 있던 아주 작은 일도 선생님께 다 말했어요. 고민이 생겼을 때도 선생님께 말만 하면 항상 해결책을 주셨죠. 그러면 고민이 정말 싹 사라졌거든요.
중3 때의 힘든 시간을 함께 해준 분도 선생님이셨어요. 덕분에 나름 순탄하게 지금에 올 수 있었어요.
저의 질풍노도 시기를 모두 본 유일한 선생님!
제게 선생님은 평소 다니던 학원 선생님과는 다르게 기억될 것 같아요. 선생님과 정말 많은 것을 나눴거든요.
아마도 선생님은 16년, 제 인생을 다 아는 분이 아닐까요?
저도 홍당무 교실에 대해선 빠삭합니다.^^ 아주 작은 추억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는 선생님이 제게 해주셨던 말씀과 응원을 기억하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혹시나 힘든 일이 생기면 선생님께 연락해도 되죠?
특히,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선생님표 빵은 팔아도 될 정도로 맛있는 거 아시죠? 모두 잊지 못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항상 저희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선생님께 정말 의지했던 은이와 진이 드림
각자 써서 주고받은 편지는 마치 상대의 질문이나 바람을 알고 적은 답처럼 연결돼 있었다. 순간, 나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헤프게 마음을 준 시간이 헛것이 아니었단 사실에 몹시 위로받았다.
관계는 함께 한 오랜 시간의 궤적보다는 그 시간이 서로를 어떻게 통과했는가로 증명됐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를 성장시켜 달라지게 한, 우리 시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20년 넘게 아이들 만나는 일을 한 덕분에 나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그들을 통해 찾았다.
사실, 나는 앞으로 1년 정도만 더 이 일을 한 뒤엔 교실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매번 도시락처럼 챙겨 오던 그 생기를 과연 무엇으로 대체할지를 생각하면 막막할 뿐이었다.
은이 진이와 잘 헤어진 일은 내게 큰 용기가 됐다. 지금 세상이 쉽게 헤어지고, 관계가 마치 소모품처럼 교체되는 환경이란 점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설명되지 않는 이별이 반복되는 시대에, 설명하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내가 맞춰야 할 퍼즐의 조각들이 아직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알게 됐다. 무엇도 예단할 수 없는 삶이지만, 마지막 퍼즐 조각을 쥔 아이까지 잘 헤어진 뒤에는 나의 다음 챕터를 열고 싶다. 아마도 그때는 헤픈 마음의 방향이 조금 더 나를 향해 있지 않을까.
은이 진이와 잘 헤어진 경험으로 확실해진 건, 이 관계가 나를 '그다음'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