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헤픈 이별의 힘

과정

by 은수

무엇을 배웠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흐려졌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존중받았는지는 오래 남았다.


내가 운영하는 교실에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가지 약속을 제안한다. 언제든 수업 종료 계획이 생기면, 한 달 전에 꼭 알려 달라는 당부였다. 사정에 따라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 약속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잘 헤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경험으로 선물할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여러 과목의 학원을 다닌다. 그뿐 아니라, 학부모에 의해 수시로 더 나은 곳을 찾아 학원을 옮기는 일도 흔하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다. 하지만 잦은 만남만큼 이별의 무게 또한 가볍기 그지없었다


사교육 현장에서 학보모에게 일방적으로 수업 종료 통보를 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나 역시 교실을 운영했던 지난 20여 년 동안 7년을 가르친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업 당일이 돼서야 수업 통보를 받기도 했다. 이런 경우, 절차에 대한 아쉬움보다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비용을 지불 한 건 부모라 해도 수업을 통해 함께 소통해 온 당사자는 선생님과 아이였다. 그동안 선생님이라고 믿고 따르며 지도를 받았지만, 마지막 인사조차 없는 헤어짐이 반복된다. 이 경험은 아이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어떻게 정의하게 할까?

필요에 의해 여러 학원을 다니고, 옮겨 다니는 사정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려 깊은 배려가 있다면 그 결과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었다.


나는 아이일수록 이별이 더 자세히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계란 그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리돼 간직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려주고 싶다.

잘 헤어지는 과정은 아이 스스로 이 공동체에서 '나는 중요한 존재' 였다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 아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헤어지는 경험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수업 종료 전 한 달의 마무리 수업 기간이 정해지면, 나는 몸도 마음도 바빠졌다. 아이마다 다르게 세워진 계획을 확인하고,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순서로 마무리 수업을 준비한다. 그동안 첨삭해 둔 아이 글을 모아 제본하고, 아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편지에 담는다. 그리고 아이가 평소 좋아했던 그림책을 준비했다가 마지막 시간에 선물했다. 물론, 나도 아이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잘 헤어지는 법을 나눴다.


며칠 후면 5년을 함께 했던 은이와 진이의 마지막 수업이다. 5학년때 어린이 인권 강의를 나갔던 학교에서 만난 뒤부터 함께해, 이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 학부모님은 처음 약속대로 한 달 전에 수업 종료 시점을 나와 의논했다.

수업 종료 시기가 정해진 뒤 한 달이란 시간은 어느 때보다 금세 지나갔다. 우린, 앞으로 못할 이야기까지 해내고 말겠다는 듯,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나는 은이와 진이의 인생에서 가장 또렷하면서도 불안정한 시기를 함께 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수업에 오면 억울하고 속상했거나, 기뻤던 일주일 동안의 일을 세세히 털어놨었다. 그 소통 방식은 때론, 대화였고, 어느 땐 글로 썼다. 나는 거의 모든 일에 아이들 편이었는데, 아이들은 그 순간이나마 억울함이 풀린 듯 통쾌해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제본할 자료를 정리했다. 함께 필사하며 깊이 읽었던 ‘어린 왕자 ‘책 사이에 편지도 끼워 두었다. 은이와 진이에게 줄 선물은 궁리를 해봤지만, 아이들이 좋아했던 선생님표 빵을 잔뜩 구워주는 것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뒤늦게야 아이들과의 이별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 같은 헤픈 이별 과정은 번거롭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얻을 경험의 깊이를 생각하면 간단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헤픈 이별식을 준비 중이다.


헤픈 이별이란 붙잡는 마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떠나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의연함이었다. 이제 내가 은이와 진이에게 남겨주고 싶은 건 글쓰기 작법보다, 관계에 대한 좋은 기억이었다.

아이들 기억에서 나는, 오래 함께 했었고, 잘 헤어진 어른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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