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무도 부르지 않는 날

성장

by 은수

새벽부터 시작한 아침 글쓰기를 마쳤다.
밥을 든든히 먹고 햇볕을 맞으러 산책에 나섰다.

얼마 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비타민 D 수치가 평균에 못 미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말인즉슨, 햇볕을 통 안 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일이나 운동, 장보기까지 외출하지 않아도 불편함 없는 생활이 유지된다는 것도 이럴 땐 문제였다. 한 번, 두 번 미루다 보니 문 밖을 나서는 일이 점점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30분 남짓 거리에 있는 카페까지 걸었다. 왕복 한 시간이면 하루치 산책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해가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새벽에 써둔 초고를 손보다가 가져온 책을 읽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볕이 정수리를 따뜻하게 데울 때쯤 나는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럴 때 나는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마음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나를 그대로 두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한 일을 내일도 반복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그 평범한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위해 가장 잘한 일은 사람을 덜 만나는 거였다. 나이 들수록 친구를 많이 만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마주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로 타인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혼자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더 친해지는 데 시간을 쓰기로 했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존재 그 자체보다 쓸모로 평가받는데 익숙한 채 살아왔다. 인정받고 싶은 열망 속에서 헤픈 마음은 늘 앞서 달렸고, 그때의 나는 천둥벌거숭이 같았다. 타인의 일도 내 일처럼 처리하느라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으니까.

어쩌다 별일 없이 하루가 저무는 날이면, 그 평온함마저 또 다른 불안을 데려왔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은 금세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그 시절은 헤픈 마음의 무모함이 가장 또렷했던 때였다.


그래서 더욱 내게 가장 시급했던 건,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늦게나마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코로나 시기는 그런 내게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모두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고립의 시간은, 내겐 뜻밖의 안정감을 남겼다. 소외감 대신 고요함이 찾아왔다.


우리는 어떤 쓸모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나는 무척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날에도 내가 그 자체로 괜찮은 존재라는 확신은, 오롯이 나와의 대화를 통해 단단해질 수 있었다.


막내는 겨울 방학이지만 하루 대부분을 학원에서 보내고 있다. 당장 아들에게 다녀올 일도 없고, 오늘 수업할 아이들 역시 방학을 맞아 가족 여행을 떠났다. 새벽에는 고양이마저 밥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말 그대로,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젠 이런 날에야 비로소, 나는 존재만으로 더 선명해진다는 걸 느낀다.


햇볕의 다독임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는 변덕을 부리는 아이처럼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저무는 하루. 그 평범한 일상에 감사한 마음이 조용히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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