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파수꾼
이맘때 제주도는 온통 초록이다. 나는 10년 전 제주로 이주한 뒤에 ‘검질맨다’는 말을 처음으로 알았다.
엉덩이에 방석을 메단 제주 삼춘들은 논밭은 물론, 잔디에 웅크리고 앉아 종일 잡초를 뽑았다. 하지만 나로선 무엇을 잡초라고 하는지, 그게 왜 잡초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도시에서 자란 이유도 있겠지만, 이름을 모를 뿐, 풀이며 들꽃 모두 손색없이 푸르고 예뻤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여느 때처럼 뒷베란다 아래에서 길냥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있었다. 그런데 때 이른 모기가 냥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바로 앞 잔디의 풀이 웃자라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잡초가 내 눈에 거슬린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척박한 땅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그 생명력을 닮고 싶다거나, 삶을 잡초에 비유하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날 나는 우거진 풀숲이 해충의 온상이 될까 마음이 급했다. 작은 호미와 가위를 들고 쪼그려 앉아 난생처음으로 검질 매기를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뿌리가 억센 풀부터 뽑아냈다. 그 옆으로 민들레며 클로버 잎, 그리고 이름 모를 여린 풀들이 차례로 내 손에 의해 뿌리를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히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잡초에 대한 내 오랜 연민까지 함께 뽑아내는 비정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 뿌리내렸다는 이유로 잡초라 불리는 생명. 그 여린 것들을 땅으로부터 뽑아 올리던 순간, 누군가에게 원치 않은 존재로 여겨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영화 <파수꾼>의 한 대사가 스쳤다.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너만 없었으면 돼…”
기태를 향한 친구 동윤의 독설이었다. 이 말은 아프다. 영화 속 기태, 희준, 동윤 세 친구의 어리고 서툰 소통 방식이 남긴 말이라 더욱 그렇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진심과 암묵적인 서열 다툼 속에서 서로의 뿌리를 흔드는 모습은 엉킨 잡초를 닮았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생긴 가해와 피해의 모호한 경계조차 누가 누구의 성장을 방해하는지 쉽게 가려낼 수 없게 만든다.
애초에 잡초가 땅의 양분을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듯, 그들의 서툰 소통 역시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오해가 쌓이고, 표현되지 못한 진심이 왜곡되면서 결국 서로의 뿌리를 뽑아내는 비극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만약,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악의가 아니라 미성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성숙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
기태는 잡초의 속성과 가장 닮은 존재였다. 잡초는 어디서든 끝내 살아낸다. 아무리 비정한 손길에 뽑혀 나가도 다시 살아서 고개를 내민다. 그러나 기태는 스스로를 뽑아버림으로써 잡초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 <파수꾼>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그들의 언어가 진심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방어적 무기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로의 진심을 오독했고, 결국 한 뿌리나 다름없던 관계는 서로를 땅으로부터 뽑아버리는 비극에 도달한다.
“너,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하냐?”
기태의 날 선 질문에는 사실, 제발 나를 친구라고 말해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간절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마음을 번역해 줄 파수꾼이 없었다.
미숙함이 죄가 된다면 누구도 죄짓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저 척박한 땅에서 파수꾼 없이 자라야 했던 시절 탓일 뿐이라고 말이다.
[나를 달래는 기록 #8]
잡초는 죄가 없다. 그저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 뿌려진 생명일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뽑아버리지 않고 끝내 살아남은 일을 감사하기로 한다.
나는 내 안의 해묵은 연민과 서툰 기억들을 검질매듯 정리해 또 하루의 나를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