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까지 와버렸쟈나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새해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심각한 얘기는 아니다. 한때 젊은 날 요절을 꿈꿨던 사람이 중얼거리는 헛된 꿈에 가깝다.
연초는 유독 괴로운 시기다. 한 해가 바뀐다고 해서 진짜 바뀌는 것도 없는데, 자꾸만 New year New me라는 문구에 기대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 싫다.
나는 그대로인데, 달력을 바꾸는 순간부터 숫자에 맞춰 달라져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든다. 뇌는 몇 주 전 선명한 기억조차도 '작년'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으로 게워내고 만다. 연속성이 부정당하거나 휘발되는 느낌은 지독하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굴복하는 나약한 뇌에 너무 서운함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언니는 아마 내게 생각이 너무 많다며 가벼운 핀잔을 줄 거다. 평생을 붙어있는 아주 가까운 자매도 완벽히 서로를 이해할 순 없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누구도 서로를 절대 심연까지 꿰뚫어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매해 연초가 되면 작년에 시작한, 어쩌면 재작년에 시작했을 법한 무수한 생각을 끊어내지 못한 채 새해를 시작한다. 그나마 시간을 실감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건 칸칸이 나눠진 종이에 오늘 있었던 사건을 찬찬히 적는 일이다. 조각조각 나눠진 칸에 생각을 일단 나눠서 부어버린다. 역법에 순응하고 의도적으로 연속성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데 그냥 흘려보내자니 너무 아깝다. 시간에 맞춰 매듭은 짓고 싶고, 언어로 표현할 만큼의 흔적은 남겨두고 싶은 욕심쟁이의 루틴이다. 그리고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다. 아무도 관심 없어도 자꾸만 내 이야기를 떠벌리는 이유다.
생각을 퍼붓기 좋아하는 성향은 여러 일들을 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또 반대로 일을 빨리 관두는 데에도 용기를 준다. 기록을 읽다 보면 기억이 무척 선명하게 느껴진다. 쉽게 과거에 젖게 되고, 부정편향은 더 강해진다.
그래서일까. 생각은 굼뜨게 움직인다. 행동으로는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더라도, 생각이 따라오는 속도는 출발선 즈음에 머물러있는 수준이다. 분명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면서, 이미 불붙은 생각에는 쉽사리 화염이 걷히질 않는다. 현실은 서울 시간인데 생각은 뉴욕 시간대에서 조바심도 없이 유유히 흘러온다.
20년 넘게 굴러온 거대한 생각덩어리다. 움직임이 느린 건 당연하다. 굳이 꺼뜨리지도 않기로 했다. 평생 예민한 사람으로 살았는데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기대도 웃기다. 나를 돌보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써야 정신이 망가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어느 순간 다짐했다.
이 얘기를 꺼내면 몇몇은 아주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일절 없다.
지난해는 고장 난 해였다. 내용을 충분히 정리하기도 전에 울컥울컥 키보드로 찍어낸 활자가 정보라며 소비되는 꼴이 싫었다. 그 꼴로 밥벌이를 하는 내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1년 내내 앞서 정리하지 못한 생각이 멍 때리다가도 예고 없이 불쑥 떠올랐다. 미치는 줄 알았다. 난 어쩌다 이렇게 지나간 일을 자꾸 곱씹는 사람이 됐지. 진짜 단단히 미쳤나. 한탄도 자주 하면서.
다행일까. 이젠 생각할 시간이 넘친다.
그러다 또 내가 헛삽질을 거듭하다 헛묘에 자리를 잡곤 이미 다 산 사람처럼 행세할지도 모른다. 이때마다 난 언니가 한 핀잔을 다시 생각할 거다.
야 넌 뭐 그런 것까지 생각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