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설맞이 할머니 병문안

27년 만에 찾은 내 몫

by 셈숭

"내 강아지, 강아지 왔능가"
할머니는 서울에서 병문안을 온 손녀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이모가 그간 모아 온 내 어린 시절 사진을 할머니께 보여드리자, 더 환하게 웃으셨다. 할머니와 내가 가장 가까웠던 때를 생각하시는 듯 옛날 얘기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시기도 했다.

어렸을 땐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다. 매일 아침 수첩에 해야 할 일, 시도해 볼 만한 레시피를 빼곡하게 적으시는 습관이 있으실 정도로 꼼꼼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 번호도 몇 번 적고 나면 금방 외우실 정도로 기억력도 좋았다. 1930년대 생이신데도 교육 수준이 높으셔서, 내게 가장 먼저 한글과 일본어를 가르쳐준 어른도 할머니였다. 손재주는 얼마나 좋으셨던지. 재봉틀 몇 번 굴리면 한 벌을 그냥 딱 맞게 완성하셨다. 한복이든, 양장이든. 어떤 옷이든 문제없이 만드셨다.

그랬던 할머니가 이젠 남들 도움 없이는 화장실 한 번을 못 가는 노인이 됐다. 외증손이 읽는 유아용 책도 재밌다며 주름진 손으로 겨우 종이를 넘기는 그런 노인.

총명하던 노인이 병상에 누울 시간 동안, 노인의 손에 컸던 소녀는 누군가를 낳아 키울법한 나이가 됐다. 스물일곱. 수십 년 전 할머니는 아이 둘을 부지런히 낳고 엄마로 살았을 나이다. 같은 나이에 그녀의 손녀는 누구를 업어 키우기는커녕, 할머니 곁에 반나절동안 멀찍이 서있는 걸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비겁한 사람이 됐다. 존경하던 웃어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겠다며, 제멋대로 과거형을 붙여가며 평가하는 오만함은 덤이다. 이건 분명 할머니께 배운 능력은 아니다. 단단히 잘못 큰 돌연변이다.

손녀 노릇 좀 해보겠다며 서울에서부터 큰 글씨로 눌러쓴 새해 편지를 할머니께 전해드렸다. "간단하다"는 한 줄 평으로 편지 이벤트는 싱겁게 끝났다. 이상하게 싱거운 손녀가 된 기분도 나쁘진 않았다. 싱거워도 손녀는 손녀니까. 잘못 큰 김에 좋은 말만 걸러 듣기로 했다.

광주는 갈 때마다 매번 아프고 따뜻한 도시다. 서울에서는 신경이 가득 곤두서있는 엄마는 광주만 가면 얼굴이 편안해진다. 옛 생각에 금방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형제들만 만나면 은은한 장난기를 머금은 채 쉴 새 없이 농담을 내뱉는다. 그래서인지 광주에서만큼은 간병인으로 지내고 있는 엄마 곁에서 말동무가 돼주는 일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엄마는 나를 돌보는 대신 당신 엄마를 돌보는 데에서 재미를 찾으신 듯했다.

어떤 가족이라면 서로 돌봄을 미룰 법도 한데, 우리 가족은 돌봄을 즐기고 있었다. 이모나 외삼촌이나 다들 군말 없이 서로를 돕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듯했다. 다들 나에 대해서도 딱히 잔소리하지 않으셨다. 아마 알아서 할 거야. 따뜻한 덕담이 마냥 감사하면서도, 부담으로 다가와 불안하기도 했다. 감사와 불안은 뇌에서 같은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라던데,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한 끗 차이다. 엄마가 그래서 항상 이런 돌봄 속에서 자라며 은근한 의무감이 섞인 불안을 키워왔던 걸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엄마의 입버릇은 습관처럼 주고받던 돌봄에서 왔다는 것만 이해하기로 했다. 스무 번 넘게 명절을 지내고서야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는 단추를 찾았다.

항상 내어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난 내어주는 데 재능이 없다. 따스운 사람이 못된다면, 주어진 온기를 잘 보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찬물이나 붓지 말기로 했다. 어쩌면 이 가족에서 내가 해볼 만한 '1인분'을 이제야 찾은듯한 명절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새해가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