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묘, NO 묘.
핑크가 죽었다.
어둡고 깊은 곳에서 떠나지 않고 마치 자기를 돌봐준 우리와 늘 만났던 그곳에서 다 보이는 곳에서 머물러 죽었다. 온몸에 눈이 덮여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몰랐겠지. 눈이 조금 녹아 반쯤 몸이 드러난 쨍한 낮이 돼서야 그제야 알았다. 핑크가 떠났다는 걸.
자기를 보여주고 떠났다는 걸.
사람들이 다 떠난 둔촌주공 아파트에서 홀연하게 서있던 녀석. 부스스해 보이지만 해가 쨍할 때면 반짝이는 모질을 가지고 있었다. ‘아 이게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는 거구나’를 느끼게 해 준 녀석. 둔촌에서의 눈빛. 마치 다 아는 냥 그렇게 꼼짝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그 눈. 어쩌면 눈을 마주친 게 처음일 뿐 나를 그전에 봤을 수도 있겠지. 이름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털 덕분에 알고 있었던 유일한 고양이. 딱 한 마리 둔촌냥이가 되기 전부터 알던 고양이.
그런 핑크가 죽었다.
고양이는 그렇게 산다. 차 밑에, 숲 덤불 속에 숨어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또 보고 몸은 숨었지만 눈길은 숨지 않고 대상을 또렷하게. 그게 고양이다.
나는 내가 고양이가 부러워서 신경을 쓰는 것도 있다. 대상이 나를 보지 못할 때도 숨어서 볼 수 있고 어두울 때도 잘 볼 수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민첩하고 영민하고 본능적이고.
무엇보다 나와 일정한 거리가 항상 유지되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면 멀어지고 없어지고 숨고. 조금 가까이 더 다가가려면 항상 시간이 필요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양이들의 시간에 맞춰서.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나는 핑크와 좋은 간격으로 적당히 가까워졌다. 그러기까지 한 4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매주 일요일 밥 당번을 가는 날 핑크가 나오던 거기서 핑크를 만나면 그다음 주의 시작이 좋았다. 지난 한 주의 위로도 되고. 일을 할 때도, 그냥 살 때도. 그냥 참 좋게 시작했다. 매일 차에 가지고 다니는 츄르상자의 마지막 한포는 늘 핑크를 위해서였다. 왜냐면 내가 둔촌주공에서 먼저 알던 고양이는 핑크 하나였으니까. 노묘라는 용어도 핑크를 통해 알았다. 그렇지만 난 쨍한 햇빛 아래 그 모질이 참 핑키 해서 인지 몰라도 남들과 같은 언어로 소통해야 편할 때 그냥 그렇다고 했을 뿐 나는 혼자 절대 핑크가 노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요일 밥 당번할 때 좋았던 건 특히 핑크가 단 한 번도 모습만 보여주는 날이 없다는 것. 그니까 핑크를 본 날은 모두 눈도 마주친 날이다. 그게 내가 핑크와 서로 알아가던 과정이었다. 내가 핑크에게 그냥 먹을 거나 주는 인간이지 않았다고 느낀 점, 반가워한 건 딱 그거다. 다 아는 냥 늘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봐 준다는 것. 난 그래서 핑크의 간식을 챙겨 다녔다. 고마운 핑크. 조금 멀리 이사 간 내게 다시 동네에 돌아올 이유로 충분했던 핑크. 떠날까 하던 나를 떠나지 않게 해 준 핑크. 신입 때부터 지금까지 힘든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다음 주간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나를 정비하는데 핑크가 도움이 많이 됐다.
정서적인 고양이라고는 일절 필요 없는 사무적인 일을 하면서 문학을 붙잡았다가 밤이면 술과 음악을 붙잡았다가. 어느 혼돈의 그 중간에서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요일. 고양이들을 만나는 일은 되려 밥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숨을 얻어먹는 셈이었다.
난 회사에서 생일 선물로 받은 반차의 반나절을 잠자코 핑크가 떠난 것만 생각하며 보냈다. 내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 받은 반나절에 나는 핑크를 떠나보낸다.
그래서 더 아프긴 하다. 치어 죽은 애들 말고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라서 생기지도 않았던 마음들이 삐져나온다. 살았을 때 많이 만난 것들이 떠나면 없는 줄만 알았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삐죽삐죽 나온다.
생각을 적다 보니 난 핑크를 노묘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정말 맞다. 핑크는 핑크다. 다 산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던 그 자리들에 나는 또 가야 한다. 나는 절대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고 다짐하길 참 잘했다. 잘 지키고 있고. 그냥 나는 그 애들을 돌보는 거지. 그 애들 모르긴 몰라도 핑크의 먼 친척들이 남아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