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에 집착하는 소인배들에게는 조용히 차단 버튼을 눌러주세요
n번방 처럼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면 꼭 나타나서 '사실은', '진실은', '실제는'을 앞에 걸고 글을 쓰는 팩트충들 반드시 있다.
아니나 다를까 26만명이라는 숫자를 두고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하아~
한숨반사가 나올 지경이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선가에서는 심지어 손가락을 자르는 스승이 나타날 지경이었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자, 내가 보기에 누군가가 무언가 과장된 숫자를 가지고, 잘못된 통계치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치자.
그럼 그 때 내가 할 말은 무엇일까?
"사실은(or 진실은 or 실제는) 그 숫자가 이러쿵 저러쿵해서 틀린 것이고 그러니 니가 가진 두려움도 걱정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여기서 대화는 끝난다.
이런 식의 '선팩트 무공감' 반응은 우리가 거의 모든 종류의 대화에서 저지르는 아주 흔한 실수 중 하나이다.
이것이 실수인 이유는 명백하다.
대화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다보니 사실관계를 두고 논쟁으로 비화되거나 상대방이 말문을 닫게 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하고 이로 인해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사안에 대해선 특별히 더 '선공감 후팩트'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팩트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대화를 주고받는 서로의 정서적 공감대가 먼저 형성되어야 숫자나 통계치의 오류가 수정될 여지가 생긴다.
그러므로 정말로 숫자나 통계치의 정확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정서적 공감과 수용의 태도를 취하고 그 다음에 숫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설령 잘못된 숫자를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믿고 말하는 감정과 의도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은 지금 매우, 몹시, 크게 끔찍한 성범죄의 현실에 화가 나 있고 이것이 지금 당장 멈추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지점부터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팩트를 따지는 사람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정서적 공감이 결여된 팩트충들은 사안의 중요성이나 사회적 파장을 축소시키려는 '숨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팩트충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담론에 기생하면서 그 사이에 숨은 각종 숫자나 통계적 오류를 찾아내고 이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박제하는 데 집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해당 주제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건설적으로', 즉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논의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현 상태 status quo'의 유지에 복무하는 이 팩트충들은 국정원의 후원 하에 이명박 정권 시절 '일베'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되었으며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담론장을 오염시키는 주범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태도가 지극히 위험한 것은, 사람들의 주의를 진짜 문제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시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할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두들 '26만이 맞다 or 아니다'로 건설적 대화의 맥을 끊는 것이 그들의 아주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에 주의하시고 혹시라도 그런 글들을 SNS에서 본다면 굳이 댓글달아서 토론하지 말고 조용히 차단 버튼을 누르시길 권하는 바이다.
참, 요즘 이러한 태도들이 하도 자주 보여서 이번 기회에 아예 이름을 하나 붙여보았다.
고(故) 한슬링 박사께서도 이 정도 패러디는 용서해주실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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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충니스 Factchungness' - 숫자와 단편적인 사실에 집착하면서 스스로의 공감을 차단하고 건설적인 논의를 방해하는 비합정적(非合情的)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