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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Aug 06. 2020

지랄의 추억

'지랄'과 '병신'이라는 단어가 어쩌다가 아주 아주 가끔 내 입에서 튀어나올 때면

(주로 오버워치 경쟁전하다가 열받아서 --;)

나의 시계는 25년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중 2병 중증이었던 시절에 나와 내 친구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개와 소를 비롯한 동물계와 10, 18 등 숫자는 물론이고 엄마를 자주 소환하던 모옷된 세대였다(맞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원조 엄창 세대다 --;)

어느 날 같은 반 친한 친구였던 김**과 나는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눈을 하얗게 뒤집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시 쓰러진 친구를 보고 저러다가 죽는거 아니냐며 놀란 나와 다른 친구들은 얼른 119를 불렀고 친구의 아버지도 급히 달려오셨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친구는 한 10분 정도 쓰러져 있다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멀쩡해졌다.

알고보니, 내 친구 김**이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그 사실을 그때서야 친구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시 친구 아버지의 걱정은 단 하나였다.

- 친구들이 이해해주고 잘 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당시 나와 함께 내 친구 김**이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 중 한 명이 내 친구를 놀리기 시작했다.

무려 '간질 발작'을 흉내내면서 말이다.

그 때 쓴 말이 '병신', '지랄', '장애인' 등이다.

둘이 원래 사이가 안좋긴 했는데 그걸 두고 놀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런데 녀석은 놀렸고 그걸 듣는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낄낄거리는 놈들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게 잘못된 발언이고 멈춰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 친구들은 곧 싸움이 날 것 같다는 예감에 둘간의 고조되는 긴장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당연히 내 친구는 거듭된 놀림에 크게 분노했고 결국 치고박고 싸웠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놀리던 그 녀석은 딱히 반성하거나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진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학교에선 여전히 '기형아', '장애인'이 욕설 중 하나로 쓰였고 '지랄'과 '병신'은 심지어 욕도 아닌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내 친구는 한 번 더 발작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별다른 언질 없이 전학을 가버렸다.


나는 하루 아침에 친한 친구를 잃었다.

그렇게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때 친구의 모습이 여전히 내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당시 거의 모든 남학생들이 즐겨 쓰던 추임새에 가까운 일상어들, '지랄'과 병신'이 내 친구에겐 과연 어떻게 들렸을까?


가슴 아프지 않았을까?

화나지 않았을까?

슬프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 나는 '지랄'이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았다.

써도 무의식중에 화가 날 때 썼다.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그 말을 쓰지 않았다.

그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자동적으로 내 친구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랄'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쓰는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1도 없다.

다만, 25년전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친구의 발작 모습이 새겨진 이후로는, '지랄', '병신', '장애인' 같은 말들을 욕으로 쓰지 않겠다는 중 2 당신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뿐이다.


장혜영 의원이 '절름발이'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내심 반가웠다.


나는 문득, 25년전 당신의 내 친구가 장혜영 의원의 발언을 들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정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쓰는 온갖 차별적 표현들을 문제삼고 지적하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고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장혜영 의원이 이번에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말을 좀 더 조심스럽게, 타자의 존재를 신경 쓰면서 하는 것은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말하기 전에 두 번은 생각하고, 뱉은 후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걸 중학생 때도 배워야했다.


그랬다면... 내 친구는 조용히 전학을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든 처음이 힘든 법이다.

어느 날 우리는 누구나 차별적 발언을 삼가하는 것이 '국룰'이 된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예감이 든다.


나는 진실로 장혜영 의원이 이번 국회에 '존재'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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