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딸기

강남역 10번 출구, 그곳에 내가 있다

딸記 #30. 16-05-19

by 오세준

결혼 전에 유마니와 연애하던 시절, 나는 매번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보통 늦은 시간에 데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버스가 끊기는 시간까지 함께하고 싶었기에 우리가 헤어지는 시간은 밤 12시를 넘기기 일수였다.

한번도 혼자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게 한 적이 없었고, 이에 대해 유마니는 나에게 고마워했고 나는 이토록 '헌신적인' 나 자신이 꽤나 자랑스럽게 느껴졌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사건 소식을 듣고 불연듯 저 기억이 떠올랐다. 왜일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보고 싶은 내 딸 덕부니. 아직은 50일을 갓 넘은 아가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기 두 발로 아장아장 세상을 활보하겠지? 그런데 아이가 좀 더 커서 아빠 없이, 혹은 엄마 없이도 외출을 하고 산책을 하고 심부름을 다녀온다고 상상하면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는다.

300미터도 되지않는 집 바로 앞의 기찻길을 아이가 혼자 걷는다고 생각하면 그 귀여운 모습에 흐뭇하다가도, 갑자기 이상한 '할아버지', '아저씨'가 우리 아이를 성추행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불연듯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상담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여성들이 경험해온 숱한 여성차별, 여성혐오, 성추행, 성폭행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 피해자이기도 하였다는 놀랍고, 슬프고,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곳은 '남성'인 '나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세계였다. 나는 어렸을 때 누군가로부터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고 성인이 된 후 밤새 술마시고 택시를 타거나 집까지 걸어오거나, 어두운 길을 혼자 걸을 때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 내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내 자신이었고, 그것 또한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곁의, 혹은 멀리 있는 '그녀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겁이 많아 '보이는' 그녀들을 질타했다. 어머니에게, 여동생에게, 아내에게 뭐 그리 겁이 많냐고 때로는 비웃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단상단 수업에서 한 분이 털어놓은 어린시절의 성추행 경험. 그 분의 용기 덕분이었을까? 집단원 중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단의 모든 여성이 성추행 경험을 꺼냈다. 그 때 내가 살고 있던 '안전한'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로부터 안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 조우한 뒤, 나의 '안전한'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강고한 정체성의 장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는 '남성'일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한 그 순간, 나는 '여성'이었다. 그들이 겪은 폭력의 기억과 함께 두려워하고, 또 울고 있었다. 그들이 남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두려움, 분노, 혐오 등 우리가 이른바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게 남자라는 이유로 "너는 남자니까..."하며 가해졌던, 그리고 내 주변의 여성들에게는 "너는 여자니까..."라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이유로 우리를 옭아매던 그 모든 쇠사슬들의 차가움과 무거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후 이른바 '남자' 혹은 '여자'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그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는 '남자'이고 '여자'이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남자' 혹은 '여자'로 규정하지 않는 삶, '원한다면' 남자가 여자의 일을 하고,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없는 삶이 훨씬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젠더의 구속에서 벗어나자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 그리고 새로운 '관계'가 열렸다. 그렇게 나는 다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으며 지금은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연결되어 있기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른 것이다. '여자'친구를 밤늦게 택시태워 보내지 않고 아무리 피곤해도 차로 데려다주었던 기억, 그것은 전혀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는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으스스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사슬을 벗었다는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고 있었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그 무겁고 차가운 쇠사슬에 묶여 여전히 철컹철컹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소리가 내 귀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여전히 나는 세상과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과 더불어 쇠사슬의 감촉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그 사슬을 풀어야 할 때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낡고 녹슬어있고 무겁고 차갑다. 혼자 힘으로는 모두를 옭아맨 사슬을 풀기 힘들다.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함께 낡은 젠더의 사슬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는 연두가 맘껏 '여성'(본인이 원한다면)으로 혹은 '남성'(본인이 원한다면)으로, 혹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언가(이게 더 낫다!)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그곳에서 한 남자가 한 사람을 죽였고
언론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죽였다"고 한다.

강남역 10번 출구,
남자는 여자를 증오하고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는 그곳에서
사람은 조용히 제단 위에 꽃을 얹는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남자가 남자이고 여자가 여자인 곳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곳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는 곳이다.

내 품에 안긴 딸아이와 함께
강남역 10번 출구를 빠져 나와
남자와 여자의 북새통을 지나
함께 제단 앞에 섰다.
조용히 꽃을 바치고 돌아선다

그 향기는 사람이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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