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정석 - 01. 집합과 연산
Procrastination, 미루기에 대한 가장 유명한 콘텐츠는 아마 서론에서 언급했던 팀 어반이 Ted talk에서 한 Inside the mind of a master procrastinator 라는 제목의 강의일 것이다.
'미루기 고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글 자막이 있는 영상의 제목은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의 심리'다.) 일을 마감까지 미루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Instant Gratification Monkey(직역하자면 '즉각적인 만족(을 원하는) 원숭이')와 Panic Monster 등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통해 쉽고 웃기고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강의다.
같은 내용의 포스트가 팀 어반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Wait But Why'에 같은 내용의 why-procrastinators-procrastinate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데 총 2편으로 되어 있으며(링크는 1편) 강의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제목에 이끌려 들어온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팀 어반의 강의는 '미루기'라는 행위의 기본적인 원리와 행동 양식을 다루고 있다.
말 그대로 '할 일을 미루지 않는 법' 입문편인 셈이다.
하지만 읽기 귀찮거나, 바쁘거나, 지금 뭔가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미루고 있는 분이라면 아래 글만이라도 정독하시기를 권한다.
팀 어반은 미루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핸들을 잡는 사람. 즉, 최종 결정을 맡는 것은 이성적인 결정권자가 아니라 즉각적 만족을 원하는 원숭이라고 설명한다. 이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일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오랜 기간이 지나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할 이유도 알지 못한다.
이 어두운 놀이공원은 미루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곳으로, 겉보기에는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낮잠이나 이메일을 새로고침하는 것, SNS, 냉장고 뒤지기 등등. 그러나 여기서 노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재미있지 않다. 죄책감이나 불안감, 공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잠들어 있던 이 괴물은 마감 시간 직전이라던가 기타 등등 미루기로 인한 무서운 결과가 실현될 조짐이 보이면 나타난다. 이 패닉 몬스터는 현재로서는 원숭이를 밀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원숭이는 사라지고 우리는 그제야 일주일 만에 졸업 논문을 써내는 기적을 이룩하게 된다.
당신이 나름 미루기 숙련자라면 아마 이런 흐름은 매우 익숙할 것이다.
어쩌면 "다 아는 내용이잖아.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이 과정에 익숙할지라도, 한 번도 이 과정에 원숭이와 패닉 몬스터를 끼워 넣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바로 당신에게 미루기와 싸울 수 있는 첫 번째 무기인 '개념화'를 쥐어 줬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나서 공감한 사람이라면 내가 하던 생각 중 어떤 것이 원숭이에 해당하고, 어떤 것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자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패닉 몬스터 역할을 맡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또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아마 당신은 "또 원숭이가 난리를 피우는군."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전에는? "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태나 어떤 현상에 대한 단어나 개념(그리고 그 단어나 개념을 알아가는 과정)은 대부분의 정신 질환자에게 병을 다루는 매우 좋은 무기가 되어준다. 병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거나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감정이나 상태, 현상이 사실보다 다양하고 작은 개념들의 유기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꽤 많은 불안이나 죄책감, 공포 등의 부정적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더 나아가 때로는 병이나 나쁜 습관을 극복해 나갈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다음부터 스스로가 할 일을 미루고 브런치 포스팅을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금 내 머릿속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게 합리적 의사 결정자가 아닌 원숭이임을 의식해보자. 원숭이에게는 미래도 과거도 없고, 현재만 존재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기는 조금 어려운 인간임을 자각하자.
물론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패닉 몬스터가 그리 쉽게 나타나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다음 포스트 '일을 미루지 않는 법 - 기본편'에서 다룬다.
여담이지만, 부제에 쓴 '집합과 연산'은 과거 <수학의 정석>의 1단원으로 일명 수포자들이 거기까지만 달달 외웠다고 하는 밈으로 유명한 챕터였으나, 현재 쓰이고 있는 개정판은 '다항식의 연산'으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