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독후감
삶의 방편으로서의 무감각
안진진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9) 다소 과장되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선언, 그러나 나는 이 말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절규임을 안다. 죽어서 살 바에야 차라리 살아서 죽겠다는 절박한 외침. 이 외침이 뿜어져 나오는 목구멍, 그 아득한 배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28) 안진진의 사회적 배경을 한 줄로 설명하는 명료한 문장이다. 꽃 선물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를 떠올려 볼 수 없는 삶.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갖다 주면 반색하는 얼굴 대신 이게 얼마냐는 질문을 먼저 접하게 되는 삶. 이러한 삶에서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도 당연하다.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20)
이 발화에서 안진진의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 아닐 것이다. 이 문장은 근본적으로는 무감각을 말하고 있다. 호기심과 그것에서 비롯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곧 고통을 접하는 통로이기에, 불가피하게 그 통로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는 덤덤한 진술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쩌면 기쁨이 왔을 것이다. “감상과 유치함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적대적”(16)인 채로 짐짓 세상에 초연한 척 사는 것이 소위 말하는 ‘철 들었다’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런 일찍 철든 아이들을 보고 대견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인정받은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이 한편의 블랙코미디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슬픔이다. 거하게 토해내고 카타르시스로 치유 받는 격렬한 슬픔이 아니라 결코 벗어낼 수 없는 찐득찐득하고 축축한 슬픔 말이다.
인물들: 반성과 격정 사이에서
한편, 철이 든 안진진은 지독한 환경에서 살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반성’을 사용한다.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반성의 틀에 포섭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불행을 신의 뜻으로 수렴시키는 종교, 시체의 부패와 악취ㅡ절대적인 무無를 포장하는 장례 등이 그러하듯이, 격정을 과장법으로 바꿔놓는 안진진의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17) 안진진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무엇에 맹목적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반성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반성을 포기하면 행복과, 그의 단짝 친구인 고통이 손을 잡고 한 통로로 걸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반면, 반성이라는 방패 없이 삶에 뛰어들었던 사람이 있다. 안진진의 아버지가 그렇다. 평범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방랑하며 살았던 안진진의 아버지는 ‘반성하는 사람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94)
이따금 아름다운 저녁놀이 뜨면 그의 내면은 격정으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무방비 상태인 그의 내면이 결국 어린아이로, 짐승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방패 없이 전선에 뛰어든 자의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의 내면을 안진진이 나눠가졌기에, 안진진은 그 스스로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아버지가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83)으로 여겨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후 아버지를 닮은 김장우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까.
안진진의 이모는 안진진의 아버지와 비슷한 성정을 타고 났으나 사뭇 다른 인생의 행로를 걸었다. 그녀는 예민한 감각을 가졌지만 반성의 성벽에 둘러싸인 채로 살던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무덤 속 같은 평온’(295)으로 회고하던 그녀의 말에서는 부잣집 거실에 박제된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새하얀 눈이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는, 그 불가능한 곳으로 달려 나가던 이모. 그러나 그녀는 죽을 때마저 커튼으로 바깥세상을 차단한 채 안온한 거실 바닥에서 눈을 감는다.
한편 이모부, 주리, 나영규는 앞서 말한 인물들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반성으로 격정을 평정한 채로 산다. “불발이나 연착 따윈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145) 이모부,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173)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곱게 자란 주리,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75) 하는 나영규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안진진은 시종일관 이들을 삐딱하게 보면서도 이들과 완전히 갈라서지 못한다. 격정의 딸로 태어나 반성의 옷을 입은 모순적인 존재가 바로 안진진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었다면 안진진이 나영규와 결혼하는 선택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즐거운 모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삶은 모순 덩어리였다. 그런 모순들 때문에 안진진처럼 울부짖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모순의 한 편에 서서 다른 편을 공격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나의 몸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모순들이 곧 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 주어진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 후미의 작가노트에서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다고, 너무 나를 나무라지 말라고” 이 말은 옳다. 그러나 여전히 회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진모에게서 더 나은 가능성을 본다. “…자신도 모르게 육성 대신 가성을 사용하고 있는 진모, 무엇이 육성이고 무엇이 가성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분별을 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248) 그에게도 분명 모순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며, 그래서 불필요하게 고통 받지 않는다. 자신만만한 진모의 모습은 모순을 비웃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