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한강, 『채식주의자』 독후감

by 세포뭉치

개는 귀엽다. 강아지는 더 그렇다. 쇼핑몰에서, 천변에서, 상점가에서 남의 강아지들을 힐끗거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통통거리는 발걸음으로 몇 걸음 가다가는 주인을 올려보고 또 별안간 길가의 잡초에 코를 박고 킁킁, 주인이 잡아끌면 못내 아쉬운 듯 연신 뒤를 돌아보며 끌려가는 귀여운 녀석들. 그 복슬복슬한 털은 또 어떻고! 무릎 위에 그 녀석을 잡아놓고 손으로 살살 털을 쓸어 주다보면 그 녀석도 나도 까무룩 잠이 든다. 그런데 왜일까. 동작을 멈추고 그 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워진다. 쓰다듬던 손을 멈추면 복슬복슬한 털 아래로 늘 빳빳이 긴장되어있는 근육, 그 사이를 지나는 수많은 핏줄들이 느껴진다. 언제든 목표물을 향해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날선 긴장감이 감지된다. 무엇보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것의 눈이다. 초점이 없는 까맣고 까만 눈. 귀엽다는 나의 감정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어떤 시선도 보내거나 받지 않는 더 없이 낯선 그 기관.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177) 영혜의 시선은 극중의 언젠가부터 개의 그것을 닮아간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의 그것으로 돌아간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172) 영혜의 시선이 개의 시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꼭 이런 의미다. 귀엽다고 하기 전에, 그런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발생하는 원초적인 감각으로 돌아간다는 것. 뇌에서 시각을 유용한 정보로 바꿔내기 전에 작동하는 ‘그저 바라봄’에 머무른다는 것, 우두커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지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지각되지 않는 아득한 영역에서, 내장의 무심한 연동운동이 그러하듯이 철저히 몸에서 비롯한 감각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주변 사람의 경악을 자아내는 영혜의 일광욕(177)은 멜라토닌과 비타민D, 구릿빛 피부 같은 걸 위한 계산적 행위가 아니다. 민들레가 스치는 바람에 떨리듯이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인혜가 뒷산에 올라 보았던 것들,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 인간적 공감이 아니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서 “서늘한 생명의 말”(이상 248)을 전하는 나무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영역을 감지하게 된 사람의 일상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일상을 자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43)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혜의 존재를 ‘교정’하려고 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일상이 붕괴된 영혜의 세계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재밌는 점은 그 거부의 양태가 분노나 울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든, 생명연장체계로서의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든 영혜가 나타내는 모든 거부는 마치 원시인이 문명의 화폐를 대하듯 무감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거부는 본래적이며 최종적인 거부가 될 수 있다. 분노나 울분이 표출됨으로써 그 감정을 표출한 사람들이 특정한 체계 하에서 억압받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 행동이 불가피하게 체계의 압도적인 지배를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는 일이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영혜나 그의 형부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가족 모임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부동산 시세 이야기를 하는 등 세속적인 면의 일방으로 비춰지는 주변 인물들은,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에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한 보색 배치로 느껴진다. 죽음으로 달려감으로써 자칫 유미주의唯美主義와 근원적 허무로 느껴지기 쉬운 삶의 양태에 대해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124)이라며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태준다. 그러나 3부작의 끝인 「나무 불꽃」이 영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결국은 인혜의 이야기라는 것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인혜는 성과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성실한 습관을 이어온 인물이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189-190),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191)와 같이, 영혜나 남편에게서 발견되는 고독을 낯설게 여기는 대목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도 그녀가 삶의 코너에 몰렸을 때, ‘뒷산의 경험’을 통해 경계 너머의 무언가를 감지하게 된다.


인혜가 영혜나 영혜의 남편과 다른 점은, 그녀는 결코 그 너머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신적 세계를 구원해낸 대가로 신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물들의 삶은 인혜의 선택지에 없다. 지우엄마로서의 삶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삶들의 경계에 서서, 이편에서 저편을 곁눈질로 비스듬히 바라보는 경계인의 고뇌, 바로 그것이 이 소설 『채식주의자』가 살 속 깊이 스며드는 이유다. 죽음 직전의 영혜를 데리고 정신병원을 나오면서 인혜가 보여주었던 행동,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261) 그것은 저편의 삶을 이해하면서도 이편에서 체계의 훌륭한 볼트와 너트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윤리다. 2007년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가로수의 경험’을 고백한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274) 경계에서의 오묘한 줄타기를 지속해야만 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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