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후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인 ‘나’는 일곱 살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54)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무의미를 글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중학교 시절의 학교폭력, 그것을 지지해줄 수 없는 불안정한 가정환경 등을 거치며 무의미가 이끄는 혼돈에 휩싸이게 된다.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 ‘나’에게 남은 것은 무한한 추락이다. 우울증, 무수한 자살충동, 심지어는 자살시도까지. 잠시 좋은 애인을 만나 안식처를 꿈꾸기도 했지만 애인과의 이별 후 ‘나’는 다시금 무의미가 이끄는 혼돈이 영원한 평안을 약속하며 손짓하는 것을 느낀다. 추락하는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방에 손을 뻗는다.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히지 않을까,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줄 조그마한 믿음이 혹시라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때 ‘나’가 만난 것이 유명한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다. 데이비드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하나의 계통도로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분류학에 수십 년간 헌신하였던 인물이다. 그 결과 자신의 주 분야이던 어류 분야에서 동료들과 함께 당대 알려져 있던 어류종의 1/5을 발견해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3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었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그의 연구실을 덮쳐 30년 간의 연구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지만, 그 스스로는 전혀 무너지지 않은 듯 사고 당일부터 지진으로 무너진 잔해를 들춰가며 사고 복구에 나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혼돈에 맞서 스스로를 구원해내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무의미로 돌리려는 자연의 무심한 공격에도 아랑곳 않고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나’가 가지지 못한 그의 강한 의지에 열등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데이비드를 인생의 항해에서 나침반의 역할로 삼을 수 없었다. 그의 분류와 계통에 대한 열망은 어류 분류에서 그치지 않았고 모든 생물들과 사람들마저 위계의 피라미드로 환원하는 데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이비드는 그 열정과 의지로 미국에 우생학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안타깝지만, 데이비드가 보였던 것과 같은 ‘질서에 대한 애호’는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돈과 질서 둘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 그 사이에는 답이 있을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광화문의 풍경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기본적으로, 내게 있어 광화문이라는 곳은 전시와 공연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세종문화회관, 경복궁을 마주하며 길을 한두 번쯤 건너면 만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익숙하면서도 고마운 건물들이다. 그런데 모처럼 전시를 보려고 광화문에 나가면 그 공간에 대한 나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풍경이 펼쳐져 언제나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 정체는 광화문 광장을 점령한 태극기 부대다. 트럭에 탄 채 볼륨을 한껏 끌어올린 마이크를 쥐고 소리를 지르는 처음 듣는 단체의 간부, 스피커에서 터져나오는 군가, 언제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태극기x성조기 컬래버레이션…. 예술적 감각이나 역사의 진동에서 태극기 부대의 악다구니로 추락하는 기분은 농담으로라도 유쾌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펼쳐내는 행동과 문화에 대한 불호가 그들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속보이는 도덕성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도덕성이 내게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그들을 혐오하지 않는 데에는 도덕 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그들을 혐오하지 않는, 아니 그들을 혐오할 수 없는 이유는 태극기 부대(아마 보다 정확히는 애국 보수)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문득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삶이란 정말이지 녹록하지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기력, 일분일초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물리적 생존을 목표로 매일을 버텨냈던 사람들에게 선진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란 기쁘다기보다는 어쩌면 어리둥절한 일일지도 모른다. ‘키오스크 앞에 선 노인의 불안’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점차로 흐려지는 정신에 나날이 부과되는 새로운 질서들, 그것에서 비롯하는 불안이 현대를 살아내는 노인들의 공통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태극기였다. 세상이 그나마 붙잡을 수 있는 속도로 흘러가던 시절,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탄압이었더라도 다른 이에게는 안정과 규율을 불어넣어주던 군사정권. 누구에게도, 어느 순간에도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혼돈의 법칙에서 빗겨나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던 집단적 믿음들. 우리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이름,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탄생한다. 입만 열면 서울대 다니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던 전문대 다니던 친구, 순댓국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한때 선임병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원산폭격 자세를 취하던 50대 아저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가 실질적으로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발밑에 아득하게 펼쳐진 허무로 추락하지 않는 일이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난간이 칼날이라도 잡아야 한다.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학적인 피라미드 체계는 이렇게 재생산된다.
피를 흘리면서까지 피해야하는 허무, 불안, 혼돈 그것은 무엇일까. 허무, 그 녀석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죽음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것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우리에게 칼날을 겨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가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수저를 대기가 미안할 정도로 호사스럽게 장식된 음식들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기 위해 플래시 샤워를 받고 나면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작 작용과 효소의 작용으로 곤죽이 되는 음식들을 떠올려 보라. 입 안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거식증에 걸릴 것이다. 우리가 문명인다운 교양과 격식으로 훌륭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우리의 소화기관은 묵묵히 연동운동을 반복한다. 우리가 그 결과물을 보게 되는 것은 대체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행동과는 정반대로 순백의 색을 자랑하는 화장실에서 뿐이다. 부질없는 생의 반복이 간단한 버튼 누름으로 씻겨나가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손을 씻으며 그것은 완전히 잊힌다. 이렇게 무의미는 체계적인 망각의 대상이 된다. 어느 가수의 말처럼 지겹게 먹고 자고 싸는 우리, 그러나 그 사실은 언제나 언어의 저편에 있다. 죽음, 부패, 악취… 그 아득함에서 느끼는 현기증에는 병명이 없다. 그런 일들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 혼돈과 질서 둘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 열역학 제2법칙이 가리키듯 명백한 사실인 혼돈으로? 그런데 우리에게 혼돈을 택할 용기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당초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혼돈을 택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걸까? 어떤 것도 질서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기에는 인류가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 그러면 질서가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을까. 데이비드의 완벽한 질서를 향한 여정이 제도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말을 낳은 것을 보면 쉽사리 질서를 택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이런 딜레마에 맞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227),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W.B. 예이츠의 말을 257에서 재인용)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264) 이런 방식을 통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262) 볼 수 있다. 그런 세계는 ‘나’가 그의 아내를 대할 때 그러하듯이 사랑으로만 열린다. 사랑, 그러니까 특정한 방식과 체계로서 대상을 해석하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온몸으로 껴안을 때 발생하는 방향 없는 얽힘으로만 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윤동주 시인의 다짐이 꼭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 넌지시 말하듯이, 그 조차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다(264). 그렇다면 일종의 방법적 질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히피들이 그러하듯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장소를 안온한 정주의 장소로 삼지 않고 언제까지나 임시적인 거처로 이해하는 것. 질서의 탑을 쌓되 그 탑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에 기꺼이 무너지는 능력을 갖추는 것, 그리고 그 무너짐을 기뻐할 수 있는 명랑함을 갖추는 것. 나는 꼭 이정도의 말랑함을 늘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