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독후감
허무한 아름다움과 선명한 고통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선대의 유산으로 여유롭게 생활하며 무용 비평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의 경력이 재미있다.
“노골적인 불만을 품은 나머지,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직접 운동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일본춤의 신진들로부터도 그런 권유를 받게 되었을 즈음, 돌연 그는 서양무용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23)
“여기서 새로 발견해 낸 기쁨은 눈으로 서양인의 춤을 볼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24)
“자신의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는 것이다.”(24)
시마무라는 일본춤 비평을 하다가 자신이 직접 춤의 조류를 이끌어 나갈 상황에 처해지자, 슥 발을 빼버린다. 그리고 분야를 바꾼 것이 서양무용이다. 이유는 서양인의 춤을 직접 볼 일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실제를 보지 않고 오직 인쇄물에 의지하여 글을 써간다. 실재의 끈적끈적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상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순전한 아름다움은 어쩐지 허무하다. 시마무라는 허공을 헤엄치듯이 사는 사람이다.
작품의 결말에서 마을에 불이 난 상황에도 그는 자못 태연해보인다. 그와 함께 있었던 고마코의 반응이 경악이라면 그의 반응은 매혹이다. 그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던 누에창고가 타오르던 현장에서도 시종일관 아름다운 은하수에 눈길을 뺏긴다. 요코가 다치고 고마코가 절규하는 가운데 작품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서늘한, 어쩌면 매정하기까지한 아름다움.
반면 고마코는 철저하게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다. 그녀는 작품이 전개되는 눈의 고장(니가타현)에서 태어나 모종의 이유로 도쿄에 게이샤로 팔렸고, 그곳에서 몸값을 치르고 빠져나왔지만 남편이 죽자 다시 고향에 돌아와 게이샤를 하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마코는 담담히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시마무라가 헛수고라며 일축하는 그녀 삶의 양상들을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단순한 헛수고라는 느낌이 짙었다. 그녀 자신은 이를 쓸쓸해하는 낌새도 없지만 시마무라의 눈에는 묘하게 애처로워 보였다.…하지만 눈앞의 그녀는 산 기운에 젖어 생기 넘치는 표정이었다.”(39-40)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사랑한다. 어떤 것도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게이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마무라의 방에 놀러오고, 그가 자신을 찾지 않으면 실망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중 백미는 다음 문장이다.
“안 되겠어요. 힘드니까 돌아가줘요. 이제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한테 올 때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이젠 남은 게 없어요. 이건 친구에게 빌린 옷이에요. 나쁜 애죠?”(126)
사랑하는 자는, 그리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타자에게 온전히 드러내는 자는 위험에 처한다. 이론을 섭렵하고 허공을 답보하듯이 사는 시마무라의 시선에 자신을 맡긴, 게이샤 고마코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시마무라와의 관계에서 그녀는 절대적인 약자다. 그녀는 시마무라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진심을 토해놓고는 금방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 비웃고 있죠. 절 비웃는 거죠.”(35) 시마무라는 답한다. “…누가 세밑에 이런 추운 델 찾아오겠나? 나중에 비웃거나 하지도 않았다고.”(36) 그러나 관계에 완전히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이 비웃음보다 훨씬 큰 모욕이 아닌가?
원경과 근경, 그 차이에서 오는 아득함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지내던 2015년의 여름날, 더없이 상쾌하게 맞이한 어느 아침이 있었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몸만 일으킨 채 문득 떠오른 생각, ‘여행을 가야겠다.’ 짐을 싸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갖고 있던 것 중에 그나마 쓸만한 티 몇 조각과 속옷, 양치할 것, 충전기가 전부였다. 목적지는 대전의 한 아파트였다. 절친이 얼마전부터 살고있는 곳인데, 건축 분양을 하다가 잔금 문제로 억지로 떠맡게 된 물건이랬나, 뭐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집밖을 나왔을 때부터 시작이었다. 지나치게 즉흥적이었던 그 날부터 며칠 간, 39도 안팎의 폭염이 예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날씨가 절절 끓다 못해 그 안의 내가 말라비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만다행으로 대전에 가는 고속버스 안은 시원했다. 그에 더한 물 한 모금은 그전의 고통을 잊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의 에어컨이 주는 달달함이 역치에 다다를 때쯤,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자체 공무원의 작품일까, 농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여러 색깔이 나는 벼들을 심어 그림과 글씨를 그린 것이 퍽 인상 깊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멀리서 바라본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뙤약볕을 버티고 서있는 벼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일사불란한 벼들의 배열과 한여름 태양 아래 벼의 낱알들. 나는 그중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사이의 아득함을?
“시마무라가 기차에서 내리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 산의 흰 꽃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산 중턱에서 정상 가까이 사방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산 위에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을 방불케 해, 아아, 하고 감동에 젖었던 것이다. 그걸 흰싸리로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는 억새의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모습은 먼산을 우러르는 감상의 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