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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묘 Sep 13. 2022

기승전결병

두서없는 글쓰기와 슐레겔이 줄 생각 없던 용기


글을 쓰는 건 외로운 작업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건 상대가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혹은 긴 시간이 흘러 글을 쓴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글쓰기가 나의 소소하지만 어이없는 생각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어느 한 귀퉁이에 끄적이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말에 의하면 나는 시간을 초월하여 누군가에게 화두를 던지는 아주 역사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감이 떠오르면 계속해서 어떠한 형식으로던지 글을 끄적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작가 지망생 (심지어 이것도 그냥 내가 갖다 붙인 이름이다)인데 굳이 모든 글에 완결성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또 내 인생에서 언제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겠는가. 게다가 최근에 전공 수업을 듣다가 슐레겔의 텍스트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는 ‘fragment’, 즉 ‘단편’으로도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하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냐 하면은, 이 사람은 ‘문장 하나’도 단편으로 쳐준다. 슐레겔 씨 만세! 물론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짧은 텍스트 안에 많은 내용을 담는 것(마치 영화 ’기생충’의 한 줄 평을 훌륭하게 작성하였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너무 어렵게 쓴다고 질타를 받은 어느 한 평론가처럼)이 가능하고 슐레겔은 그런 의미로 단편 안에 우주를 담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겠지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알게 뭐란 말인가.


이런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기승전결에 대한 열망으로 자꾸만 이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하나의 주제를 뽑아내려고 한다. 내 소설 취향 때문에 그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맨 끝에 어떠한 결론으로 결부되는 그 순간이 너무 좋다(이와 같은 경험을 하고 싶다면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를 읽기 바란다). 서사만이 줄 수 있는 짜릿함과 전율이 존재한다. 내 글에도 그러한 이어짐이 있기를 바라는 것 역시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그런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교훈을 얻어내려는 나의 습성은 인생을 보는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아무래도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어떠한 더 거대한 서사 안에서 풀어지기를, 그 어떠한 사건의 결론이 지금 겨우 이것이 아니라 나중에 더 큰 완결로써 끝맺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가 도무지 되지 않는 일들이 더 큰 서사의 일부가 아니라면, 기승전결의 ‘기’ 혹은 ‘승’ 정도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참 인생에 회의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지금은 생각해보니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간다. 예전의 내가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했다면, 지금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을 잘 감내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어려움은 어떠한 방식으로 계속하여 나를 찾아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관점으로 삶을 조망한 적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인간이  속에서 서사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존재론적인 고민을 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소위 말하는 ‘기승전결병 결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에 있어서 글쓰기는  특이한 일이라고   있다. 명확한 서사가 있기를 바라는 인생에 어쩌면 영영 매듭지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허점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서없으며 투박하고 잘 정돈된 글은 아니지만 이 글을 통해 독자의 3분 정도를 즐겁게 했다면 필자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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