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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묘 May 19. 2022

국제미아

국제미아 되지 않기의 히든 레벨

이번에 여행을 시작하면서 단단히 다짐했던 것이 있다. 국제 미아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누군들 해외여행을 하면서 국제 미아가 되고 싶을까), 나한테는 혼자 외우는 마법 주문 같은 거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이번에 떠나는 교환학생이, 그리고 한 학기가 끝나면 하기로 마음먹은 여행이 홀로 떠나는 첫 여행이자 외국으로 혼자 처음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없이 외국으로 나간 적은 있었으나 그건 어떤 무리에 속해서였지, 이렇게 아주 혼자는 아니었다. 


특히 오늘처럼 공항에 왔을 때는 더더욱 내가 얼마나 덩그러니 홀로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에든버러에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집으로부터 5000마일 넘게 떨어져 있으며, 내 가장 가까운 도움은 기차를 타고 10시간은 넘게 가야지 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근심 세포가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되뇌어도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아직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아직 내가 '완전히 홀로 똑떨어져 있음'을 완벽하게 자각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길 바랄 뿐.


하여튼, 국제 미아 되지 않기 프로젝트는 현재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일단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여권 잃어버리지 않기'를 매우 잘 수행하고 있다. '지갑과 핸드폰 잃어버리지 않기' 역시. 나머지는 뭐... 부수적인 것들이다. 아니면 수하물로 부친 짐이 나와 같은 비행기에 잘 탑승하는 것처럼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거나.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국제 미아 되지 않기'에 레벨 2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새로운 레벨에 나는 벌써 실패해버린 것 같다. 



"Home is where your heart is."


누군가가 이 말을 듣고 흥미로운 주장을 한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론은 이러했다: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집이라는 말에 너무나도 동의합니다. 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 산 적이 없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겁니다...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라도 살게 되면 우리는 그곳에 좋든 싫든 마음 한 켠을 두고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두고 온 마음은 귀향할 때 다시 따라오지 않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다시는 예전과 같이 완벽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행을 너무 많이 다닌 사람의 재수 없는 헛소리 정도로 치부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마음 한 켠을, 어쩌면 그보다 좀 더 많은, 예컨대 한 7분의 1 정도를 두고 온 곳이 있었다. '16년 전에 잠깐 살았던 게 뭐 대수라고 아직도 미국에서 살다 온 얘기를 우려먹냐'라는 비난을 받을 감수를 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너무 어려서 내가 마음을 빼앗긴지도 몰랐던 그곳은 바로 뉴저지 주의 작은 동네인 클리프 사이드 파크(Cliffside Park)이다. 




뭐 대단한 게 있었던 동네는 아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들이 늘어져 있고, 괜찮은 식당들이 몇 군데 있으며, 백인들보다 이민자들이 더 많이 살았던 그런 곳이었다. 어찌 보면 본머스랑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점은 대학 신입생들이 훠얼씬 적다는 점 정도. 하여튼, 이 동네에서 티끌만큼 살았다고 내 고향이 한국과 미국으로 갈라져버렸기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8살 이후부터 사실상 국제 미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내가 미국을 고향으로 여긴다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 한국이냐 미국이냐 묻는다면 나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한국이요,' 하고 답할 것이다. 다만 나의 심적인 고향이 단지 한국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한 번이라도 다른 동네로 전학을 가본 사람은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나에게 다시 미국에 가서 살라고 한다면 완벽하게 적응할 자신이 없다. 아마 한국을 아주 많이 그리워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빠른 와이파이를 말이다. 그건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아주 많이 그립다.) 어찌 되었든 나의 가족도, 친구도, 일상도 전부 다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클리프 사이드 파크에 두고 온 마음 한켠은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남기고 온 발자국처럼 언제까지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 한켠이 그곳에 계속 머물 동안에는, 내 안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은 한국에서 계속하여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미 레벨 2에 실패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미 국제 미아인 상태로 여행을 시작해버린 이상 말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국제 미아는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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