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취지는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일 텐데, 통하는 것이 마음이 아니라 각자의 비수인 경우가 많다. 날카로운 비수를 던져 서로를 관통시킨다. 결과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등을 돌리고 뛰어간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서로로부터 뒷걸음치며 물러나기도 한다. 너와 나 사이 차이에 깜짝 놀란 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때 벌어진 사이로 불신의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곧이어 건널 수 없는 협곡이 만들어진다. 더 이상의 소통을 포기한다. 평생 하고 사는 건데 우리 소통은 왜 이럴까?
‘너’로부터 시작해서 그렇다. ‘너’라는 상대에 대해서 아는 거 솔직히 없지 않나. 안다고 착각하기 일쑤이고, 그 착각 위에서 판단하고 비교하고 비난한다. 나와 제일 가까운 사람, 그러니까 ‘나 자신’은 얼마나 이해할까? MBTI며 각종 심리테스트를 두더지 게임하듯이 해대고 심리학 관련 콘텐츠를 걸신들린 듯 찾아보는(내 이야기다) 걸 보면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평생 연구 과제가 따로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남은 어떻게 이해한담?
소통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나마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너’보다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의 구조에 따라 처음이나 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하기 전 오롯이 살펴야 할 것은 내 마음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필요가 충족되어서 또는 충족되지 않아서인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그것을 자극한 장면의 기억을 복기한다. 내 '눈'이 본 것은 무엇인지, 또는 내가 봤다고 착각한 것은 없을지. 이를 상대방에게 솔직히 나누고 요청하거나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비폭력대화라고 한다. 사람들이 서로 연민으로 더 깊이 연결되고,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소통의 방식이다.
비폭력대화라니, 그럼 우리가 하는 다른 소통은 폭력적이라는 거야? 많은 나오는 질문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다만 생각보다 크고 작은 폭력(violence)적 요소가 우리말에는 포함되어 있다. 꼭 타인에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있다. 내적으로 스스로에게 하는 셀프 토크도 대화가 아니던가. 심지어 그 셀프 토크에도 판단, 비교, 비난 등등이 다량 함량 되어있다. 요즘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많은 자존감 책이 이를 반증한다. (내 책장에는 아예 한 칸이 전부 자존감에 대한 책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다. 구급약통처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기 좋게...)
“우리 지역(나라)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화를 내선 안돼. 이야기하는 중에 자리를 박차고 문을 쾅하고 닫는 것은 굉장히 모욕을 주는 행위로 간주돼.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웠어! "
"우리 문화에서는 원래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해. 싸우고 화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러니까 애초에 기계식 키보드 쓰지 말아 달라는 내 이야기를 네가 무시하지 말았어야지!"
다시 키보드 전쟁 한복판으로 돌아오자. 머피와 션이 각각 서로에게 한 말은 어떤가? 둘 다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두 사람이 말속에 숨긴 날은 서로를 베고 찔렀다. 비폭력과는 먼 방식이다. 공격은 회피 또는 반격을 불러일으킨다. 머피의 한마디에 션이 욱하며 공격을 받아쳤고, 이에 머피는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대화 방식을 달리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소통을 위해 앉아있든 관계가 회복되거나 타협안을 찾는 것이 무리일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사나워진 협곡을 건너갈 다리를 놓는 것도 소통이었다. 조심스러운, 안전한 다리를 찬찬히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아주 어설프게 알고 있던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이후 NVC)를 가져왔다. 여기저기 교육을 받으며 귀동냥했지만 정식으로 과정을 밟아본 적은 없는 상태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새로 학습한 내용을 망라하여 미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NVC에 대해 짧게나마 소개하였고 회의하는 동안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주길, You라고 너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I, 나로부터 말을 시작해보자고 힘주어 권유했다.
하지만 비폭력대화(NVC)를 진짜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더 제대로 된 트레이닝과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내 막간의 소개로는 사실 택도 없다. 서로에게 이미 상처를 주고받았던 사이에서는 ‘네’가 너무 미운 나머지 ‘나’로 돌아와 이야기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괜찮게 흘러가는 듯해 보이던 대화의 장에 순식간에 돌풍이 불어닥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타운홀을 잠시 중지시켰다. 서로 숨을 돌릴 시간을 주는 한편, 머피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버럭 화를 낸 션은 머피가 다혈질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었는가와 상관없이 그 트라우마는 늘 따라다녀. 그렇기 때문에 네 두려움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해. 하지만 너무 미안하게도 우리가 여기서 논의를 그만두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야. 무리시켜서 정말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서로 노력해서 끝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함께 심호흡을 해보자고 권유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들이내쉬고 하면서 다행히 머피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모두에게도 호흡명상을 시켰다. 평소에 명상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마치 프로 명상가처럼 호흡을 이끌었다. 내뱉은 숨 사이로 억하심정의 마음이 함께 조금 빠져나갔기를 바라며, 타운홀을 재개했다.
이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말이 활을 떠나기 전 바로 끊어버리고 즉시 정정을 요청했다. "어엇 잠시잠시~ 미안하지만 금방 하려던 말, You가 아니라 I로 다시 시작해줄래? 어떤 행동으로 인해 네가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 네 감정과 욕구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줘. " 사태가 심각하다 보니 내게 없던 단호함이 생겨났다. 고맙게도 멤버들은 내 단호한 개입에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말을 정정했다. 기계식 키보드에 예민한 그가 느끼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길 요청했다.
“션은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그냥 싫어하는 것 이상의 고통이라고 해. 션, 어떤 고통인지 모두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 “기계식 키보드 소리는 그냥 시끄러운 게 아니라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들려”
" 헐… 그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다니 상상도 못 했어. 정말 정말 유감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커뮤니티의 멤버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해. " 갈등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윤이 말했다. 그의 진심 어린 공감은 션뿐만 아니라 진행을 맡은 나도 감동시켰다. 션도 화가 누그러지는 듯해 보였다. 그런 공감으로 다리가 하나씩 만들어지더니 깊고 험준했던 협곡을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션이 사과한 것이다.
"화가 난 나머지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 미안해. 그리고 키보드 소음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렇게 션의 사과, 윤의 공감, 머피의 용기, 진하의 양해를 발판으로 우리의 논의는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니 기계식 키보드 외에도 각자가 느낀 불편이 여럿 발견되었다. 예컨대, 아무리 다이닝룸이라 할지라도 친구를 초대해서 오랜 시간 수다를 떠는 것. 주방에서 이어폰이 아니라 스피커폰 모드로 팟캐스트를 듣는 것. 짧게 끝날 주 알았는데 길어진 통화 같은 것들.
이야기를 들으며 '나만 불편한 게 아니었구나, 아 그게 너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구나' 발견하고 공감했다. 이런 다양한 불편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거실은 그저 거실이 아니란 점이었다. 정말 진지한 업무 공간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생산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말이다. 쾌적한 업무 공간이 되기 위한 약속을 하나씩 정해갔다. 거실을 업무 공간으로 정의하고 그에 맞게 대우할 시간을 설정하기로 합의했으며, 그 시간 동안에 지킬 친구 초대, 전화 통화 등 각종 소리에 대한 규칙도 정했다. 머피와 진하는 거실에서의 기계식 키보드 사용을 포기하기로 했다. 거기에 대해 둘은 행복하진 않았지만 이해했다.
"주중 9시부터 6시까지를 코워킹 시간으로 할까?"
"미안해,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유럽에 있다 보니 6시는 좀 일러. 조금 더 늦게까지 연장이 가능할까?"
"오케이 그럼 8시까지 어떨까? 그 이후에는 거실에서 사람들이 편하게 쉬고 놀기도 해야 하니까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아. 다들 어때?"
"좋아!" "문제없어!"
그렇게 이어지지 않을 것 같던 협곡에 다리가 만들어졌다. 서로 조금씩 내려놓고, 조금씩 얻었다. 전체적으로는 갈등 이전보다 커뮤니티 전체를 놓고 보면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다음날부터 바로 화기애애해졌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를 피해 다닐 이유는 없어졌다. 점차 거실에도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다시 편해지고 또 좋아질 일들을 쌓아갈 차례였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갈등은 이어졌다. 키보드 전쟁에서 처음 등장한 비폭력대화를 우리 커뮤니티에 중요한 축으로 심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다문화 커뮤니티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니까. 먼저 공간 내 비폭력대화에 대한 소개와 적극 사용을 독려하는 공지문을 붙였다. 당연히 효과가 없었다. 결국엔 비폭력대화센터의 입문 과정 정식으로 등록했다. 3일간 매일 하루 종일 진행되는 코스였다. 그때 꽤나 절박한 마음이었다. 다행히 코스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비폭력대화 신봉자로 거듭났다.
비폭력대화 교육 한번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대화를 성찰하고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연습모임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커뮤니티도 예외일 순 없었다. 비폭력대화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면 성실히 학습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다. 매월 1회 함께 모여 비폭력대화의 네 가지 요소에 관찰, 느낌, 필요, 요구에 대해 하나씩 배우고 토론하고 연습한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이런 것이다. ‘화가 나 보인다’는 과연 관찰일까? ‘무시당한 느낌’은 정말 느낌일까? ‘혼자 있고 싶다’는 건 필요일까? 무엇이 부탁일까? 라테는 말이야는 왜 공감적 듣기가 아닐까? 중간중간 건너뛴 달도 몇 번 있어서 이제 합하면 총 7번 정도의 세션을 한 셈이다. 적지 않은 회차다. 얼마나 나아졌냐고?
“아, 이건 사실 모르지. 내가 또 그럴 거라고 으레 추정했네!” “아, 위로해준답시고 내가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렸군. 나도 모르게 그가 이야기할 기회를 뺏아버렸네. 그만 닥치고 잘 들어줘야지.” 바로 비폭력대화대로 실행하는 건 어렵지만 각자가 한 말에 대해 인지하고 성찰하는 수준까지는 왔다. 크면서도, 커서도 깊은 연결을 위한 소통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이 정도의 성장은 사실 꽤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평화의 빛을 들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비폭력대화 수업을 듣고 또 배움을 커뮤니티와 나누면서 깨달은 것은 내 말하기와 듣기도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여나 상처 줄까 봐 살금살금 말의 길을 놓는 나는 성큼성큼 가는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았다. 누구에게도 무해한 인간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지만, 속으로 너에 대한 속상함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복수는 은밀하고 소심한 방식이었다. 더 이상 나의 온화한 사랑을 너 따위에게 허락하지 않겠다. 이런 식. 나의 날은 안으로 향해 나있거나 꼬불꼬불 이상하게 꺾여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걸 워크숍을 진행하는 매회 느낀다. 더 다정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자고 모여준 친구들과 조그마한 한보 한보를 내딛는다. 전진에 비해 후퇴는 삽시간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니까 단련은 계속된다. 나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