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 지내면서 불편했거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점이 있어?”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저녁 8시가 되면 우리 집에서는 타운홀(반상회)이 열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조건 월 1회 진행한다. 거실에서 모이니까 눈과 비는 사실 상관없지만. 오히려 날이 안 좋을수록 더 좋다. 지각의 원인이 되는 외출이나 여행 계획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타운홀이 정기화되는 데 더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당위성이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일정적으로 같은 시기에 시간을 빼는 것은 쉽지 않다. 조율과 양보, 포기가 필요한데 이를 위한 강력한 이유를 제시하는데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타운홀 없이도 당장의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안건은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잠깐 논의해 결정했고, 중요 안건이 있으면 1회성 회의를 가졌다. 그렇게 논의를 ‘때워도’ 괜찮았다.
계속해서 '언젠가’로 미뤄지던 타운홀을 정례화시킨 것이 다름 아닌 키보드 전쟁 같은 대환장 잔치들이었다. 대부분의 갈등의 시작은 약불에 올려놓은 물 같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끓다가 누군가의 임계치를 넘고, 그것이 또 다른 이의 임계치를 넘기다 보면 순식간의 모두의 끓는점을 넘어갔다. 오랫동안 약불에 보글보글 끓어온 문제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알렉스의 식칼이 있다.
알렉스는 식칼을 사용하고 난 다음 꼭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곤 했다. 나는 처음에 말없이 그 칼을 치웠다. ‘별 거 아니지.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리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런 흐름을 기대했다.
아 맞다. 칼 치우는 거 깜빡했었다. 엇, 근데 누군가 대신 칼을 치워줬네? > 칼을 오래 그 자리에 있으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래서 직접 치워줬나 보다 > 다음부턴 바로바로 치워줘야겠다.
‘이렇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몇 번 정도 반복되면 알겠지. 기다려줄 수 있다. 나는 잘 기다려주는 사람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지만 칼은 여전히 매번 미아가 됐다. 자기 행동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가 너무 빨리 치워버리나 싶어 전략을 바꿔보기도 했다. 이번엔 그대로 두고 며칠 기다려보았다.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에는 칼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바빠서 그랬겠지 - 라는 추측 역시 빠르게 배반당했다. 알렉스는 수박을 잘랐던 자리에 칼을 그대로 둔 채 거실 소파에서 한참 뒹굴뒹굴거렸다. 그래, 좀 쉬고 나서 치워줄 거야 - 하며 또 기다렸다. 칼이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 칼을 보면서 보고 있지 않은 척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칼을 방치한 채 외출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누적된 피로감이 내 뒤통수를 쿵하니 쳤다.
"칼 쓰고 나면 치워줘~" 이제 적극적으로 요청해보았다. 그도 주의하겠다고 답변했으나 내가 원하는 변화는 요원해 보였다. 평생 해온 습관을 바꾸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예민하게 구는 잔소리꾼이 되기 싫어 이제 무한 인내 모드에 돌입했다. 참자. 참자. 다른 친구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내게만 문제라면 참으면 된다.
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주방에서 미자와 대화하다였다. 아마 주방에서 어쩌다 마주쳐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사이에 여지없이 알렉스가 놓아두고 간 식칼이 있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그 칼 위에 겹치는 순간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화제 역시 그 칼로 옮겨오면서 그 칼에 대한 불편감을 조심스럽게 털어놓게 된 것이다. 그 해 초여름에 합류한 미자 역시 알렉스가 치우지 않는 식칼이 못마땅했다. 다만 그 역시 참고 이해해보려 애쓰느라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나는 내 불편감이 예민해서 그런 게 아니란 사실과 아군이 있다는 발견에 내심 희망을 느꼈다. 한편 별다른 말이 없던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처럼 불편해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더 있을까 걱정도 됐다. 공론장이 필요했다.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신호는 칼 문제 외에도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던 참이었다. 여러 번의 일정 조율을 거쳐 겨우 합의된 어느 주말 저녁, 거실에 여섯 사람이 모였다. 오래 묵혀둔 것부터 꽤 최근의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고, 그중에 칼은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나 알렉스, 칼 쓰고 난 다음에 꼭 좀 치워줘.
알렉스 어, 그게 왜 그렇게까지 문제야? 우리 문화권에서는 보통 그렇게 하는 걸?
나 (무슨 그런 문화가 있단 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전개다) 어..? 음… 여기는 그렇지 않아. 무엇보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 너무 보기 싫어. 스트레스받아.
미자 아니, 칼이 있으면 너무 위험하잖아.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떡해? 우린 개도 키우는데 혹시라도 떨어지는 칼에 맞거나 하면?
나 칼을 바로 씻어달라고까지는 부탁 안 할 테니까, 싱크대 안으로만 옮겨줘.
알렉스 나는 싱크대에 쌓여있는 게 더 보기 싫은 것 같은데?! 어떻게 바깥에 칼 하나 정도 나와있는 게 더 안 좋은 거지?
나 흠...
미자 아니, 칼이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 안 위험해?! 그냥 좀 치워줘!
알렉스 알았어, 알았어. 주의하도록 할게.
알렉스와 나, 이렇게 둘이서만 이야기했다면 나는 아마도 싱크대에 넣어놓는 것과 테이블 위에 방치하는 것 둘 중 뭐가 나을까 생각에 잠긴 채 유야무야 넘어갔을 것이고, 이후 또 아무렇게나 나와있는 칼을 보며 마음에 꽂히는 비수를 느끼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끈한 스타일의 미자 덕분에 칼에 대한 논쟁은 어찌 됐든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휴…). 알렉스 칼 사건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타운홀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사안이 소소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이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이 어찌 보면 소소한 일들이다. 말하기엔 애매해서 ‘에이, 뭐 이런 것 가지고’ 하고 지나가는 그런 것들. 하지만 아무리 100의 1 정도의 불편함이라도 6명의 사람이 겪는다면 금방 100의 6이 되고, 거기다가 30회에 걸쳐 반복된다면? 이는 더 이상 소소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대하지도 않기에 누군가의 임계치를 초과하기 전까지는 이 불편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자칫하다간 서운함과 무안함 그리고 상처를 크게 키울 수 있다.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다. 소소해 보이는 사안을 위해 따로 공론장을 만들긴 부담스럽지만 이미 정기적으로 열리는 자리가 있다면 좀 더 거리낌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쓱 흘릴 수 있다.
일대일로 한 요청에 대해 요청을 받은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에도 커뮤니티가 함께 그 불편감을 인지하고 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다면 이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특정 멤버의 행동이 변해야 하는 사안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차원에서의 협의 또는 합의가 필요한 사항에도 적용이 된다. '겨울철에 욕실 창문 얼마나 열어두는 게 좋을까, 집안 인터넷 속도가 느린 것 같은데 해결이 가능할까?'와 같은 것들 말이다. 사안이 소소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함께 문제로 인식하기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먼저 출발해야만 합의든 협의든 창의적 해결책을 고안하는 것이든, 어떤 해결책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 서로의 이유를 알 수 있다.
미자가 칼을 보기 싫은 이유가 나와 같을 거라 으레 짐작했는데, 까고 보니 착각이었다. 나는 정돈되고 쾌적한 환경을 바란 반면 미자는 그보다도 안전성을 바랐다. 그가 위험성에 대해 문제 제기했을 때 나는 사실 짐짓 놀랐다. 칼이 잘못해서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그의 걱정에 나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 칼은 그렇게 가장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감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이유를 듣게 된 것은 소중한 기회였다. 왜라는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좀 더 정확한 배려를 할 수 있다. ‘어, 위험하게 느끼려나? 미자에게 괜찮은지 물어볼까?’하고 말이다.
한편 이유를 알면 판단을 유보하게도 된다. 알렉스가 칼을 바로바로 치우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의 문화적 배경이 있었던 탓이다.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니 다행이군...) 왜 식칼을 자꾸만 놓고 다니는지 묻지 않고, 왜 식칼이 그렇게 보기 싫은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대화했다면?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상대 역시 내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운함의 벽을 높게 높게 쌓았을 것이다. 이후 알렉스의 습관이 완벽하게 고쳐지진 않았지만 미자나 나나 이전만큼 화가 나지는 않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렉스도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나름대로는 오랜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완벽한 변화가 어려운 문화적 맥락이 있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오해들이 시나브로 쌓이다 보면 서로에 대한 판단이나 실망으로 굳어질 수 있고, 이미 그런 마음으로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 그렇게 되기 전에 빠르게 문제를 해소하려면 이제부터라도 타운홀을 정기적으로 하면 좋겠는데, 다들 어때?”
칼을 둘러싼 갈등을 겪으며 타운홀을 정기적으로 열어야 할 이유를 다 함께 ‘체감’했다고 느낀 그날, 나는 미팅의 끝에 슬그머니 이런 제안을 끼워 넣었다. 다행히 끼워팔기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합의와 약속은 다르고, 약속과 헌신의 무게 역시 달랐다. 회의에 늦거나, 사전 연락 없이 불참하는 경우가 특히 초기에는 연이었다. 좌절했다가 화가 났다가 속상했다가 종래는 미안했다. ‘뭐, 이게 회사도 아닌데.’ 근데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짓인가 하고 자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율하고 양해를 구해 어찌 됐든 모이게 했다. 갈등의 불씨를 조기에 다 진압해버려야 한다는, 같은 갈등의 구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불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는 와중 커뮤니티는 점점 성숙해져 문제 해결에 쏟아야 할 시간이 꽤 줄어들었다. 문제의 무게도 점차 가벼워졌고, 합의점에도 금방 도달했다. 그러다 보니 논의할 거리가 현저히 적은 타운홀이 이어졌다. 뻘쭘할 정도가 돼서 신속하게 역할 분담을 한 뒤 모임을 종료하거나 시기에 따라선 환영회 송별회 등의 이벤트로 대체했다. 어찌 됐든 멤버 전원이 함께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전통을 만들 순 있었지만, 이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타운홀이라는 하나의 문화의 뿌리가 이제 내리기는 시작했으니 조금씩 다져가고 물을 주고 키워야 할 때였다. 문제 해결, 그 이상을 위한 기회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