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타운홀에서는 갈등 관리에 목적을 집중했다. 갈등을 다루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합의하고 개발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이 개발 과정을 갈등이 시작시킨다. 갈등이 제공하는 서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깊어진 이해를 기반으로 우리만의 공존 방식을 찾아간다. 그 과정을 민주적이면서 즐겁게 해가는 것, 그 경험이 커뮤니티의 중요한 문화 자산이 된다.
한편 갈등 해결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함께 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를 발견하고 협의하는 것은 이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개인이 좋은 루틴을 만들려고 할 때도 없애야 할 구습관이 아니라 이를 대체할 새 루틴 형성에 집중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할수록 코끼리 생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을 그만 봐야지라는 목표보다 심심하면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심심해지면 책을 봐야지, 그런 선택이 쉽도록 내가 재밌게 볼 책을 바로 옆에 두어야지,라고 방향을 설정하는 것처럼.
게다가 타운홀이 갈등 해결을 중심으로만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 자칫 우리는 커뮤니티를 갈등과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놈의 집구석, 하면서.
큰 갈등의 능선을 몇 구비 넘어오다 보니 커뮤니티 문화가 시나브로 안정되어갔고, 처음에 길었을 때 2시간 넘어 걸리던 타운홀이 점점 짧아져 어떨 때는 10분 만에 끝나기 시작했다. 해결해야 할 갈등이 별로 없었고, 가벼운 사안들은 협의 없이 부탁과 수락으로 간결하게 마무리됐다. 아무래도 귀한 시간을 뺏는 것 같은 미안함에 해결할 갈등이 별로 없으면, 중차대한 안건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타운홀을 후다닥 끝내버렸다.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면서. 그러니까 부담이 되는데 희생해서 어쩔 수 없이 모이는 장으로 타운홀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안함에 급급해 타운홀을 마친 어느 날 무안하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최선이 아닐 텐데.’ 타운홀이 문제 해결에만 그치고만 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둘이서, 셋이서, 때론 넷이 함께 종종 시간을 보냈지만 커뮤니티 멤버 전원(주로 다섯)이 제대로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타운홀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기에 가능한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 기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의 미래를 함께 직조해나가는 것이었다.
변화는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존 멤버들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한편, 새로운 멤버가 올 때 이런 변화 가능성에 대해 미리 조금씩 흘려 예상할 수 있도록 했다. 시기, 시간, 진행 순서, 프로그램, 방식 등 조금씩 손을 봤고 심지어 이름도 개명했다. ‘Townhall and Beyond(타운홀 앤 비욘드 - 타운홀 그 이상)’으로! 산불도 초기 진화가 중요하듯 갈등이 커질 틈이 없게 2주에 한번 30분 짜리였던 타운홀은 이제 월 1회 2시간 30분 분량의 커뮤니티 이벤트로 탈바꿈했다. 본격 타운홀 1시간, 이후 진행되는 커뮤니티 워크숍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 시간 동안 1. 함께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성찰, 제안, 협의하며 2. 유대 관계와 소속감을 강화하고 3. 커뮤니티의 핵심가치를 재확인 및 장려하며 4. 커뮤니티의 다음 발걸음들을 함께 계획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 타운홀은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순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선 지난 한 달간 고마웠던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한다. “빗물이 샜을 때 침착하게 먼저 대응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경주 여행 기획해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좋은 곳들 많이 방문할 수 있었어!” “격하게 환영해준 모두에게 고마워. 덕분에 두려움이나 불안 없이, 아주 마음 편하게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내 인생에서 새로운 챕터를 열 수 있었어.” 공개 감사를 통해 지난달의 다양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공동의 기억으로 승화시킨다. 한편 서로를 돕고 커뮤니티에 기여한 것 또는 그리하여 받은 것을 알아주고 공개적으로 인정(recognition)함으로써 감정적으로 보상하는 한편, 우리의 서로에 대한 지지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기여의 샘이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갈 수 있도록 넛지(nudge)하는 효과도 있다.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자연스레 지난달에 기념할 만한 소식을 다 함께 다시 축하하기도 한다. “영지, 시험 합격 정말 너무너무 축하해!” 이렇게 해서 몰랑몰랑해진 분위기를 타 껄끄러울 수 있는 주제로 넘어간다. “지난달 혹시 불편하거나 아쉬웠던 사항 있을까? 개선하면 더 좋을 만한 것들?” 식탁뿐만 아니라 음식물이 오고 갔던 곳에는 부스러기나 자국이 남으니 꼭 닦아달라, 12시 이후에는 화장실 문을 닫을 때 조금 더 주의하자. 오래된 문이라 소리가 크게 난다. 다 함께 놀고 난 후 해산하게 되면 누군가 설거지를 도맡았다고 그냥 가지 말고 거실 쪽 불이라도 꺼주고 가주라 등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건의 또는 제언은 평균적으로 두세건 정도 나오는 편이다. 없는 경우도 있다.
과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래로 나아간다. 커뮤니티가 알아두면 좋을 만한 개인 일정부터 시작해 함께 준비해야 할 공동 일정까지 논의는 작게 시작해 점점 커진다. 같이 산다고 모두가 서로의 소식을 동일한 수준으로 알지는 못한다. 오며 가며 들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퇴사하는 날짜가 며칠인지, 제주도 갔다가 오는 게 언제인지, 시험이 언제 시작하는지 등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한번 더 공유하고 커뮤니티는 필요한 서포트를 고민한다. 제주에 곧 간다는 친구에게 제주 완소 장소 리스트를 이따 공유해주기로 약속하고, 퇴사하는 친구를 위해 퇴사 기념 파티를 계획한다. 시험 기간 동안에 무엇을 조심하고 배려해주면 좋을지 확인한다.
요즘엔 주로 함께 놀 궁리하는 것만으로 바쁘다. “다음 주에 불꽃축제 갈 건데 같이 가고 싶으면 알려줘~” 자신의 계획을 공유하며 관심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생일파티나 송별회를 계획하기도 한다. 멤버들 생일만 챙겨도 일 년이 참 잘 가는데, 그 외에도 연중 기념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핼러윈에 이태원을 갈 것인지, 크리스마스트리를 언제 세팅할 것인지, 새해엔 떡국을 먹을지, 3주년 행사를 어떻게 해야 기갈나게 열 수 있을지 등. “우리 어린이날에 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린이날도 예외는 아니었고, 장난스럽게 나온 이야기는 실행력 좋은 몇몇에 의해 추진되어 아직 철들지 못함을, 아니 철들지 아니하였음을 기념했다. 서로 앞다투어 초대하고 제안하다 보면 이미 한 달 스케줄이 빽빽해진다.
다음으로 역할 분담을 한다. 함께 작당 모의한 이벤트가 있다면 이를 위한 역할을 나눈다. 핼러윈 파티에 배경으로 깔 음악과 영상은 스미스가, 피자 주문은 영지가 하기로 한다. 경은이 떡꼬치로 간식을 준비하기로 하고, 내가 그 외 추가적인 꾸밈을 맡았다. 이벤트를 준비하는 일은 대체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에 자원한다. 제비뽑기로 랜덤 하게 역할을 정하는 분야도 있는데 바로 가사이다. 오가닉 쓰레기 담당 (화장실 쓰레기/음식물쓰레기 처리기 관리), 주방 마스터 (주방 내 청결/정돈 담당), 일반 쓰레기 배출 담당, 재활용 쓰레기 배출 담당. 현재 이 4-5가지 역할을 나눠서 하고 있다. 각 역할명을 적은 포스트잇을 집어갈 때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 살짝의 긴장감과 기대감이 스친다. 피하고 싶은 일이나 원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누군가 피하고 싶은 일이 내가 선호하는 일인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서로 간에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화장실 쓰레기 비우는 거는 정말 하기가 싫은데 나랑 바꿀 사람??" "아, 나 이제 알 거 같고 다음 달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릇 정리 담당할 수 있을까?? 나랑 바꾸지 않을래?"
이때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가사는 아닌데 매달 바꾸는 역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타운홀 리더’이다. 타운홀이 꼭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도록 사수하고, 리마인드 하고, 필요시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타운홀 하는 동안에는 진행을 하면서 직접 또는 누군가에게 위임시켜 기록을 남기고 후속 공유되도록 책임진다.
이렇게 1시간여 만에 타운홀이 마무리되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난 커뮤니티 워크숍으로 넘어간다. 여기서는 ‘공존 역량’을 커뮤니티 차원에서 키우는 것이 취지인 활동을 한다.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을 메인으로 하되,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지할 수 있는 다른 활동들도 섞고 있다. 워크숍에는 현재 같이 살진 않지만 서울에 있는 알럼 나이(동문) 멤버들 또는 친한 친구들도 초대해 함께 한다.
타운홀 앤 비욘드에 모든 멤버는 필수로 참가해야 한다. 우리 커뮤니티 내 유일한 의무사항이다. 어쩔 수 없는 일정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참석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정이 있으면 가능한 모두 참석 가능한 날로 조율하려고 한다. 그런 날을 맞추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요즘엔 벌어지지 않지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의무화를 해제하는 것이다.
의무화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자발적으로 전원이 오는 자리가 되어가면 좋겠다. 놓치면 너무나도 아쉬울,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정말 너무너무너무 손해인, 그런 자리가 되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걸 위해 무료 음식으로 유혹하고 싶진 않다. 음식이나 간식은 이따금의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는 정도까지가 좋다. 타운홀에서의 전체적인 경험이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이 되면 좋겠다. 타운홀 앤 비욘드, 이것보다 그 이상으로 가는 거다. 너무 큰 욕심일까? 뭐, 함께 계속 고민하고 실험하다 보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지금도 꽤나 즐거우니까 말이다.
나는 벌써 다음 타운홀이 기대된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타운홀 리더가 되었는데 간만의 기회인 만큼 재미지게 해 볼 생각이다.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역할 분담을 적은 종이를 집 곳곳에 숨겨놓고 보물 찾기를 해볼까 싶다.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해보고 알려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