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람 앞에서

회복탄력성 : 내가 제주에서 살았다는 증표

by 센짱

대문을 들어서니 빨랫줄에 걸린 안거리 할머니의 빨래가 앞뒤로 흔들거렸다. 이 아주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건은 제주말로 바람이라는 뜻이다.


불볕더위에 그 흔하던 바람마저도 피서를 갔는지 한 2주간은 무풍의 나날을 이어졌다. 에어컨 덕분에 한 여름을 어찌저찌 지내었지만 어딘가 갑갑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귀한 손님을 모시는마냥 모든 창문을 열었다. 창문들은 모두 큼직 큼직해서 문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실제로 침대를 두개 새로 들일 때 창문을 통해 옮겼다. 문 같은 마지막 창문을 여는 순간, 길을 막고 있었던 방해꾼을 밀쳐내고 급한 일을 보러가는 마냥 바람이 슝- 하고 집을 통과해서 반대방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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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좋다아-.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도, 간만에 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 대책없이 침대에 벌러덩 누어버렸다. 누워서 바람을 느끼고 있으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아진다.


어느덧 두 달. 제주에 온지 어느덧 두달이 되었다. 친구는 당시의 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고 한다. 그 때 좀 우울하긴 했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상황들이 있었지만, 도착하자마자부터 한동안 불어댄 무시무시한 비바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내 행복의 조건에는 이동의 자유가 꽤 중요한데, 스쿠터가 주요 이동수단인 나는 어마무시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가파도에서 바람에 옆으로 누인 청보리를 보며 키운 바람에 대한 낭만은, 생활인이 되자마자 사라졌다. 드디어 제주에 산다는 기쁨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과 환경 앞에서 짜증과 불안이 더 컸다. 올레 길을 걸으며 바람과 함께 거칠지만 제주다운 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제주의 생명들을 ‘관찰자’로서 보며 감동을 먹었지만,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바람과 더불어 살아야하게 되는 건 어렵기만 했다. 괜히 자괴감이 들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것, 혹은 사람들이 가진 타고난 강인함에 대비되어 나는 더욱히 연약하게 보였다.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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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성세기해변에서 처음 개시한 텐트의 커버가 바람에 날아가서 실종이 되어버렸을 때는, 작은 일이었지만, 이미 제주 바람에 넌덜머리가 나있었다. 함께 왔던 친구들을 보내고 나는 그 곳에서 올레길을 잠시 걸어가서 그 다음 정류장 쯤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장마는 끝난 시점이라 비 없이 강한 바람만이 불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부는 바람은 열을 식혀주어서 다시 조금 반가웠다.

등대 앞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앉아있다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드러누었다. 누은 방향에 해변이 보였다. 바다의 물결이 크게 일렁거렸고, 저 멀리서 하얀 풍력 발전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누어서 보다가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저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풍력발전소를 돌리는 것도, 내 오토바이를 밀쳐내며 겁나게 했던 것도 같은 바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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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조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혹은 어떤 프레임에 옮겨 놓을 것인가, 누구에게 쓰이는가에 따라서 그 조건의 가치는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을.


“예지는 제주에서 목표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벗이 물었다.


숨(SU:M) 캠프 기획을 잘 해내는 것? 콘텐츠를 많이 생산하는 것?

그것보다 내 입에서 툭.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Resilience,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것이요.


심리학에서 회복탄력성은, ‘곤란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능력’ 으로 정의된다. 내 관찰 속에서 제주는 바람이라는 숙명적인 난관 앞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은 회복탄력성을 더욱 강력하게 훈련받아왔고 이젠 제주의 DNA에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들에 비해 나의 회복탄력성은 보잘 것이 없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들은 하나도 못하고 가더라도, 이 바람 속에서 제주에서 살면서 나는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이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 이유, 그 이유를 만든 한 단계 깊은 차원에서의 이유, 더 나아간 이유들을 나는 계속 찾아갈 것이고 내용이나 방법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내려놓아야 하는 바람이 불었을 때 그때마다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이 에너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풍력 발전소의 터를 생각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는 또 다시 무기력의 늪에 빠지지 않고 나 답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2주간의 폭염 끝에 불어온 바람을 두 팔 벌려 맞이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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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풀과 나뭇잎을 흔들어놓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다짐했다. 바람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자고 . 제주의 폭낭이 바람의 결대로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내듯, 제주의 돌담들이 그 사이 사이 틈을 통해 바람을 통과시켜 오히려 안정적이게 되듯, 그렇게 같이 살아보자고.


그렇게 내가 제주에 물드는 것이,
한 때 내가 제주에 살았었더라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되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