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입학 수석에게 수여하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이름이 '작은 시지프 장학금'이었다. 내가 입학하기 1년 전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에 희생된 고 이현진 선배를 기리는 장학금이었다. 왜 시지프였을까. 본인의 온라인세상에서 쓰던 ID였고, 평소 부지런히 남을 도왔기에 주변에서도 이 선배를 그리 불렀다고 한다. 유족위로금으로 나온 4억 중 1억을 우리학교, 2천만원을 입학 예정이었던 서울대 후배들을 위해 내놓으신 이 선배의 아버지는 저승에 있는 딸이 기뻐할 것이라 했다.
그 장학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 참사와 나 사이의 연결성을 느낄 수 있게한 처음이자 당분간 유일했던 링크였다. 나는 고 이현진 선배를 이따금씩 떠올렸고, 한편으론 시지프를 생각했다.
한 윤리강의에서 그 강사가 시지프의 신화를 설명한 방식이 강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들에게 노여움을 산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서 정상에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데 문제는 그 바위가 정상에 가닿자마자 다시 굴러떨어진다는 것이다. 강사는 한번 상상해보라 했다. 다시 저 바닥으로 굴러내려간 바위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시지프의 시선을, 그리고 그 바위를 다시 굴리기 위해 저벅저벅 걸어서 내려가는 다리의 무게를. 상상만으로도 내 걸음이 다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카뮈는 자신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비극은 그 노동과 노력에 희망이 없음을, 무용함을 자각하고 있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영화 <퍼스트맨>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시지프를 상상하면서 느꼈던 무게를 다시 느꼈고, 이 선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기억력이 지지리도 없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한번에 만난적 없는 고 이현진 선배의 이름을 지금도 정확하게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선배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왜 그 참사는 대구여야 했을까.
일어나더라도 그 때여야 했을까.
왜 마침 그 칸에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타고 있었어야 했단 말인가.'
답도 없는 이런 부조리 속에 많은 유가족들은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내가 태워줬으면’
‘가기 싫다는 학원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탓하고 질문해보았자 상실을 돌이킬 수 없어 ‘무용’하다. 이 선배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부금은 선했던 이 선배를 기억케 하지만, 살아돌아오게는 할 수가 없다. 불가역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탓할수도 없다. 부조리 속에 각자의 바위를 굴려 올린다. 결국 시지프가 된 건 이 선배가 아니라 이 선배의 아버지이고, 이 세계에 남겨진 모든 유족들이었다. 영화 <퍼스트맨> 속 닐 암스트롱 또한 내 눈엔 또 한 명의 시지프로 보였다. 어린 딸과 동료들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퍼스트맨>속 암스트롱은 삶의 무게가 너무 과중하여 일이 차라리 피난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달에 간다면 어떤 심경일 것 같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담백한 대답을 하고, 돌아와서도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엔딩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유리창 너머의 아내와 손키스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 등을 보면 ‘누구보다도 내가 꼭 달에 갈거야! 내가 죽기 전에 달에 꼭 가고 말거야.’라는 굉장한 목표지향적 자세로 갔다기보다, 담담하게 자신 앞에 주어진 바위를 밀어올려내는 매일의 끝에 얻은 부수물 중 하나인 것이다.
어느새 이젠 떨쳐낼 수 없는 나의 바위를 바라보고 섰다. 올해 겪어냈어야 했던 일만 해도 감당해내기 어려워서 나는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댔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무거운데 앞으로 더 무거워진다니 깜깜한 생각이 들면서 한편 내 주변의 닐 암스트롱들이자, 시지프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이 새삼 들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는 알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한두가지이랴. 사랑하는 누군가 아프다던지, 떠나보냈다던지, 본인이 아프다던지, 과중한 육아부담으로 인한 우울이라든지. 페이스북에서 볼 수 있는 환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은 각자의 바위를 밀어올리는 와중에 얻는 달 착륙과 같은 순간들이 아닐까. 그 중에 누군가는 진짜 달에 착륙하기도 하는 것이고. 하지만 달에 착륙하던, 하지 못하던 상관없이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삶의 부조리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자체가 위대하고 박수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카뮈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부분에서 <철학자와 늑대>를 쓴 마크 롤랜즈의 이야기가 연상되었다. 그는 밝은 감정의 상태만이 행복은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던 늑대 브레닌이 떠나고 슬프게 울부짖던 순간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한 그는 너무나 사랑했고 그래서 그만큼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의 순간 충만하게 존재했단다. 그에게 행복은 존재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한편 위로가 되기도 한다. 도대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지, 부당해보이는 생(生)의 무게 앞에 답을 구하지 못할 때 이렇게 행복을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를 해보는 것이 필요해보인다.
무엇보다 유념할 것은 그것은 오롯이 각 시지프의 몫이라는 것이다. 모든 바위의 무게는 천금같이 무겁고,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각각은 너무나도 개별적이다. 영화 <퍼스트맨> 속에서 아내 재닛이 닐의 투쟁을 돕기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따뜻한 손길과 깊은 사랑과 신뢰를 담은 눈빛 그 외엔 사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녀 또한 한 명의 시지프이기도 하다.
'이제 좀 괜찮아질 때가 되었지 않냐', '더 힘든 사람도 있어'
이런 서로의 바위 자랑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 접어두자. 각자의 너무나 개별적일 수 밖에 없는 투쟁을 존중하자. 그리고 그저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보내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다행히 나에게도 그런 눈길과 손길이 있다. 이제 막 시작된 나의 투쟁을 버틸 수 있겠다는 낙관이 드는 이유다.
바라건대, 그 눈길과 손길들을 내민 시지프들에게 나 또한 그러한 눈길과 손길을 보낼 수 있기를. 그리고 당신의 투쟁에도 따뜻한 손길과 눈길이 함께하길. 특히나 어떠한 형태이던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을 경험한 모든 시지프들에게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한순간도 거두지 않는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 가길. 나는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