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없었지만 책은 있었다

by 고니비니SN

어릴 적 나는 피아노, 미술, 수영 같은 예체능 학원을 다니고 싶었다. 친구들이 방과 후 교복 위에 미술 앞치마를 두르거나 피아노 학원으로 향할 때면 부러움이 마음 한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삼 남매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하루하루를 버티기에도 벅차 보였다. 그런 부모님 앞에서 "나도 학원에 다니고 싶어"라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그 말은 사치처럼 느껴졌고,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 아이가 되었다.


중학교 음악 시간은 그래서 더 괴로웠다. 선생님은 매 수업마다 돌아가며 계이름을 읽게 했다. 음표를 읽지 못했던 나는 친구에게 몰래 처음을 물은 뒤, 교과서에 계이름을 적어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러나 그런 요령이 통하지 않을 때면 선생님의 폭언이 쏟아졌고, 음악 시간은 그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자연스레 ‘돈’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가 되었다. 마트에 가도 물건보다 가격표를 먼저 봤고, 원하는 것이 있어도 “이건 얼마야?”라는 말이 먼저 입에서 나왔다.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자식들의 의사보다 비용을 먼저 걱정하셨고,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돈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돈은 늘 부족했고, 그래서 늘 불안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나와 정반대였다. 남편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건 자유롭게 배울 수 있었고, 먹고 싶은 음식도 돈 걱정 없이 고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연애할 당시, 그는 메뉴를 고를 때 가격을 보지 않고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당당히 주문했다. 반면 나는 메뉴판보다 가격표를 먼저 훑었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 작아 보였고, 나는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옷을 살 때도 남편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고르고, 나는 원단보다 가격표를 먼저 봤다. 우리는 360도 다른 세계에서 자라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꾸만 계산부터 하며 살았고, 마음이 가는 방향보다 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결심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음식, 가고 싶은 곳을 돈 걱정 없이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내가 돈을 이끌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결혼 후 맞벌이를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부모님은 늘 최소한의 용돈만 주셨다. 교통비와 점심값만 받아 생활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부족한 돈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다. 친구들과의 소소한 즐거움조차 내 힘으로 만들어야 했던 그 시절은, 지금의 내 씀씀이와 생활 방식을 만든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임신과 동시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며, 원치 않던 외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우리는 좁은 투룸에서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무리한 대출을 감행하면서 집을 구입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대출 원금과 이자를 내가 일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건강에 연이어 적신호가 켜지면서 외벌이는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벌써 11년. 돈 걱정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드는 비용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아이는 호기심이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나처럼 원하는 것을 말조차 못 하고 꾹꾹 눌러 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또래의 엄마들이 하나둘 학원을 보내기 시작할 때, 나는 매달 돌아오는 대출 상환과 고정 지출 앞에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한숨이 깊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십팔 년 책육아』. 육아가 힘들어서, 답이 보이지 않아서 시작한 독서였지만, 이 책은 내게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결심했다.

“학원보다 책을 먼저 주자.

비록 학원은 보내지 못하더라도,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어주며 아이가 책 속 세상에서 마음껏 꿈꾸게 했다. 중고서점에 함께 가서 아이가 원하는 책을 직접 고르게도 했다. 혹여 집에 와서 그 책을 당장 읽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책을 고르는 행복’을 알려주고 싶었다. 돈 걱정에 아이의 학습을 ‘엄마표’로 하기로 마음먹은 나에게 책은 전부였다. 책은 세상과 연결된 창문이었고, 기회였고, 가능성이었다.



지금 나는 매일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다. 책 속에서 아이는 꿈을 키우고, 인성이 바른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 어릴 적 내게 허락되지 않았던 세상과 감정을, 아이는 책을 통해 누리고 있다.

가격표부터 보며 자라온 나는 이제 아이에게 책을 건네는 엄마가 되었다. 돈 앞에 움츠러들던 내 모습이, 이제는 책을 통해 넓어지는 아이의 세계를 지켜보며 조금씩 펴지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돈보다 풍요로운 것’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엄마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아이에게 전하고자, 오늘도 나는 조용히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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