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아빠는 1년만 더 해보라고 말했고, 엄마는 취직하고 결혼하길 원하셨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나는 결국 ‘현실’을 택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큰 빚처럼 느껴졌고, 그 시간만큼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빨리 취직하고, 돈을 벌어 부모님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집에서 5분 거리. 야근 없는 조건까지, ‘운명’ 같던 일자리였다.
하지만 그 환상은 한 달 만에 깨졌다. 야근은 일상이 되었고, 외근까지 겹치면서 몸과 마음이 빠르게 지쳐갔다. 시험 준비하던 지난 시간이 오히려 그리울 정도였다.
결혼 적령기, 내 나이는 점점 ‘선택’을 재촉했다. 이 일을 계속하다간 결혼은커녕, 삶 자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송무 업무를 배우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부모님께는 알리지 못한 채 사직서를 내고,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단체면접, 긴장, 공허함.
정신이 몽롱한 채 면접을 마치고 친구와 라면을 먹고 있던 그 순간, 전화가 왔다.
“구세나 씨, 합격하셨습니다. 다음 주 출근입니다.”
기쁨에 친구와 손을 맞잡고 방방 뛰던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부산,경남권에서 가장 큰 로펌에서 3년을 보냈고,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만났다.
아이를 낳고 3개월이면 회사에 복직할 줄 알았다. 정년이 보장된 회사였기에 떠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와 회사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회사를 내려놓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택했다. 그 선택은 아름다웠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으로 망가진 몸,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 현실,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흐름 속에서 나는 3년이 아닌 11년째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하루를 보내는 일상은 끝없는 전쟁 같았다.
기저귀를 갈고, 밥을 하고, 청소와 빨래에 정신이 팔린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불안은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자존감은 점점 무너졌다.
“내가 만든 아이는 내 뜻대로 자라야 해.”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아이는 나를 증명하는 존재처럼 느껴졌고,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이를 다그쳤다.
그러다 어느 긴 겨울방학의 아침, 아이가 역할놀이를 하자며 다가왔다. 피곤한 나는 짜증을 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아니야. 아이는 고작 다섯 살이야. 제발 그만해.”
그리고 나는 아이와 함께 울었다. 그 울음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도움 받고 싶었지만,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은 나 자신 뿐이었다. 책을 집어 들었다. 육아서, 교육서, 심리서, 부모교육 강의까지. 3년간, 읽고 듣고 기록했다.
허리디스크와 약한 체력으로 강의실 맨 끝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존재감 없이 조용히 배우기만 했던 내가 어느새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배운 내용을 아이와 나에게 적용해 보았고, 점점 나에 대한 신뢰가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는 인스타그램 서평 이벤트에 참여했다. 외벌이 가정 형편에 늘 중고책만 사주던 터라, 아이에게 ‘새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팔로워도 적었고, 영향력도 없었지만 용기를 냈다.
그 작은 도전은 1권, 10권, 100권이 넘었고 서평을 시작한지 4년째인 지금 500권이 넘는 책을 서평했다. 읽고, 쓰는 일은 나를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도 처음이야.”
“지금 겪고 있는 혼란은 성장의 과정이야.”
“아이를 통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줘.”
그 문장들이 내 마음 안에 조용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학교에 입학한 아이 가방에 사랑 쪽지를 넣어주고, 알림장에 긍정의 문장을 써넣었다. 경제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책과 강의 속 기록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자존감은 서서히 회복되었고, 삶에 대한 꿈도 점점 또렷해졌다. 이제는 전업주부라는 말이 더 이상 나를 억누르지 않는다.
전업주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나를 키우는 일이 될 수 있다. 내 방식대로 꿈을 꾸고,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모든 희망의 시작은 책이었다. 책은 내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다시 나를 믿게 해 준 용기와 기회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