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꿈은 경찰이었고, 군인이었다. 성룡과 이연걸의 영화를 즐겨 보시던 아빠의 영향으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화를 따라 보게 되었다.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정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주먹 하나로 약자를 지키고 세상을 바꾸는 그들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마음에 품었던 경찰과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꽤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경찰행정학과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유아교육과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아빠의 바람을 뒤로하고 나는 경찰행정학과로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2학년부터 전공이 나뉘는 법률행정학부에 입학한 후, 경찰행정학과로 자연스럽게 진학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길은 내 예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배들과의 대화 중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경찰공무원 채용에는 ‘키 제한’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조건이었다.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 하나로 학과를 선택했지만, 정작 경찰시험의 기본 요건조차 몰랐던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꿈이 좌절되었다는 자각과 함께 큰 혼란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경찰행정학과가 아닌 법학과로 진로를 틀어야 했다.
꿈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군인을 꿈꿨다. 그중에서도 해군은 현재 내 신체 조건으로도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매일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며 체력을 기르고, 관련 서적을 사서 혼자 공부도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단단한 계획도, 간절한 실행도 없이 그저 되고 싶다는 욕심만으로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한 번, 꿈을 놓아야 했다.
나는 2년 터울의 삼 남매 중 첫째였다. 첫째라는 책임감도 있었고, 가정 형편 역시 녹록지 않았다. 만약 내가 휴학을 하게 되면, 세 남매가 동시에 대학을 다니게 되어 감당하기 어려운 학자금 부담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휴학이라는 선택조차 마음속에서 꺼내볼 수 없었다. 휴학은 우리 집에서 ‘꿈’이 아닌 ‘사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신 부모님은 졸업 후 1년이라는 시간을 내게 주셨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정작 졸업하고 나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선 이력서를 썼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작정 지원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의 눈치가 보였다. ‘어른’이 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내 힘으로만’ 직장을 구하는 게 이렇게 고된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결국 나는 서울에 있는 법률사무교육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하지만 서울은 친척도 없고, 혼자 가본 적도 없던 낯선 도시였다. 그런 곳에 혼자 공부하러 가겠다는 내 말에 부모님은 쉽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서울에서 공부가 아니라, 일자리를 찾자는 쪽으로.
그렇게 다시 서울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한 개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면접 연락을 받았다.
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도착해 처음 본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우리는 멍해졌다. 부산에는 고작 3호선뿐이었는데, 서울엔 무려 9호선까지 있었다. 면접장까지 길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면접이 끝난 후, 나는 사무장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합격 여부를 알려주신다면 내려가는 길에 집을 구하고 가겠다고 말이다. 사무장은 웃으며 변호사와의 2차 면접을 제안했다. 운 좋게도 나는 12월 26일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절박한 마음이 만들어낸 단단한 용기였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회사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고 없는 서울에서의 외로움과 날로 어려워지는 업무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중, 대학교 선배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주말마다 노량진으로 향했다. 공부하는 선배들의 모습에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회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아빠가 주셨던 1년의 찬스를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옥 같았다. 밤낮이 바뀌고, 체중은 점점 줄어들어 생애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내려가면,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해골처럼 마른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불합격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보다 더 상처받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차마 속상하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3년간의 수험 생활을 마무리하고, 집 근처 직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의 삶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결국 퇴사를 하게 되었다. 몸은 점점 무너져갔다. 하루하루 온몸의 통증과 싸우며, 죽음이 오히려 해방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육아는 고되고, 나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다.
한때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내가, 어느새 꿈도 열정도 잃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시작한 게 독서였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고, 다시 꿈꿀 수 있었다. 책은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점점 독서에 빠지면서 시작한 서평은 내 삶에 작은 희망이 되어주었다. 경제활동이 없던 나였지만, 서평으로 받은 책을 딸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배우지 않았던 글을 쓰면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서평은 어느덧 4년이 되었고, 장기 서평 서포터즈 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쓴 서평은 500권이 넘었다. 읽는 행위는 습관이 되었고, 짧은 글이라도 쓰는 행위는 나를 다시 꿈꾸게 했다.
책과 글쓰기는 엄마가 된 후 사라졌던 내 안의 꿈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겨졌던, 오롯한 '나'를 다시 꿈꾸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안에 작지만 새로운 꿈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 글이 그 시작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다시 나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