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남편의 지인들과 계모임을 시작했다. 남편의 지인들은 나에게도 학창 시절 선배들이었다.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선후배였지만 학교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결혼 후에야 인연이 이어져 계모임이라는 이름 아래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경기도, 울산, 부산 등 각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1년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모여 친목을 다졌다. 계모임의 계주는 경기도에 사는 오빠가 맡아 주었다. 모임이 지속될수록 한 명, 두 명 결혼을 하며 가족이 늘고 분위기도 풍성해졌다.
이 모임은 남편에게 유일한 친목 모임이자, 나에게도 마음 붙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게 10년을 이어온 이 소중한 인연 속에서, 올해 처음으로 ‘해외여행’이라는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여행지를 두고 의견을 나누고, 숙소를 고르고, 일정을 조율한 시간만 8개월이 넘었다. 모두가 설렘 가득한 준비 기간을 지나, 5월 드디어 다낭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긴 비행이 부담스러운 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7년 만의 해외여행은 그 불안마저 설렘으로 덮어 주었다.
책으로 먼저 떠난 여행도 의미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낭 여행 책 속의 음식, 건물, 화폐를 눈으로 익히며,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차례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다낭은, 5월의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날씨로 우리를 맞이했다. 한국은 아직 봄바람이 불었지만, 다낭은 이미 여름이었다. 우리는 팀원들보다 반나절 먼저 도착해 호텔로 이동했고, 짐을 풀자마자 곧장 시내로 향했다.
배고픔과 기대감에 우리는 쌀국수, 넴루이, 모닝글로리 등 베트남 전통 음식을 가득 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다행히 입맛에 잘 맞았고, 여행 첫 식사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방문한 다낭의 한시장은 새로운 세계였다. 좁은 통로를 따라 빽빽이 들어선 가게들, 한국어로 능숙하게 말을 거는 상인들,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물가에 평소라면 망설였을 소비도 이곳에서는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래, 괜찮아"하며 OK를 외치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았다.
그날 저녁, 연이어 도착한 오빠와 언니들과의 재회로 하루가 더 특별해졌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식사 자리에서, 벌써부터 여행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총 10명의 구성원 중 결혼한 세 팀, 미혼인 두 사람, 그리고 두 아이가 함께했다. 아이가 함께한 두 가족 덕분에 일정 곳곳에서 자연스러운 배려가 오갔고, 육아 중인 우리 부부도 오랜만에 온전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곳은 바나힐이었다. 해발 1,487m의 산 위에 세워진 테마파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길부터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절로 감탄이 나왔고, 처음 보는 건축 양식과 이국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놀이기구 하나하나에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남편과 아이가 놀이기구를 타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고 또 담았다.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고, 더 자주 눈이 반짝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 속, 나는 마음속으로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긴 육아 속에서 보상이라도 받는 듯, 매일같이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잠깐의 여행이지만, 몸도 마음도 가볍고 따뜻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미소 짓게 했을까?
이국적인 풍경 때문일까, 오랜만에 지인들과 함께한 여행 때문일까. 물론 그 모든 것이 한몫했지만, 결국 나를 웃게 한 건 ‘평온함’이었다. 오랜만에 간 다낭에서 나는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쉼’을 느꼈다. 아이가 마음껏 웃을 수 있게 허용하고 나 자신에게도 잠시 쉼을 허락한 시간들이 나를 행복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행복이란 결국 다름 아닌, ‘평온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