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첫날부터 모터보트를 탄 듯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번 방학은 평소보다 더 복잡했다. 딸과 함께 도전하려던 한자 자격시험, 그리고 내가 진행 중인 백일의 글쓰기. 두 마리 토끼를 쫓기엔 시간이 빠듯했고, 결국 나는 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8월까지 글쓰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 같이 시험 보자고 한 약속을 못 지키게 돼서 미안해. 이번엔 혼자 시험 보면 좋겠어.”
“알겠어, 엄마. 그럼 이번엔 혼자 칠게. 다음 시험은 꼭 함께하자.”
딸은 서운한 기색 없이 이해로 대답했다.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시험일까지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딸의 학습은 속도를 내지 못했고, 나는 마음속에 조급함이 하나 둘 쌓여갔다.
그 와중에 친구 남편이 출장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오기로 했다. 딸에게도 친구딸과의 특별한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저녁을 함께 준비하고,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뿌듯했다. 아이들은 그날 밤 새벽 한 시까지, 마치 시간이 도망갈까 봐 전력을 다해 놀았다.
다음 날 아침 친구의 딸은 안과를 들렀다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부랴부랴 유부초밥을 만들어 친구와 친구딸을 맞았다. 점심을 먹고 또 한바탕 역할놀이가 시작됐다. 웃음과 상상력이 넘치는 놀이를 지켜보며, 나는 아이의 하루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곧 다시 현실이 시작되었다. 수영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겨우 학습의 시간을 마련했다. 이미 몸도 마음도 지친 아이는 집중하지 못했고, 나 역시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내 감정은 참지 못하고 터지고 말았다.
“너 하고 싶은 거 할 때는 눈이 반짝이더니, 공부할 땐 왜 눈꺼풀이 무거워?”
차가운 말투에 딸은 놀란 듯 눈을 떴고, 억지로 다시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감정의 끈이 끊어진 나는, 어른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어린아이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말리는 남편도 뒤로 하고, 나는 딸에게 쌓아두었던 서운함을 마구 쏟아냈다.
“학기 중에 네가 동생이랑 놀고 싶다고 해서 엄마는 시간도 만들고 장소도 마련해 줬어. 그런데 왜 약속을 안 지켜? 엄마는 지금 너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화가 나.”
내 말에 아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마음 알겠어. 그러니까 우리 서로 화해하고 다시 열심히 해보자.”
그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도대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가.
하지만 내 안의 토라진 아이는 끝내 딸이 내민 손을 외면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내가 화를 풀 때까지 조용히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결국 딸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을 나의 불안과 계획으로 가득 채워 아이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안한 건 딸이 아니라 나였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격증이라는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동생과 어울려 놀던 그 몇 시간의 웃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아이와 나의 시간을 분리하지 못하고 억지로 하나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딸은 결국 끝까지 학습을 마쳤다. 그리고 조용히 아빠에게 다가가 피곤하다며 투정을 부렸다. 엄마 곁엔 오지 못한 채, 아빠에게 가서 마음을 털어놓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의 시간은 아이의 것이고, 나는 그 시간에 동행하는 어른일 뿐이었다. 그 동행이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는 따뜻한 그림자이기를, 오늘도 다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