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분리하는 순간 배움이 시작된다

by 고니비니SN

유치원 겨울 방학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아이가 작년에 사촌 이모에게 선물 받은 색칠하는 종이 플레이 하우스를 꺼내 들었다. 크기가 워낙 커서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오늘따라 색칠을 하고 싶었나보다. 나는 식탁이 걱정됐다. 물감이 흰 식탁에 묻을까 봐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신문지를 깔지 않으면 물감이 식탁에 묻을 것이고, 그걸 본 나는 결국 아이에게 짜증을 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문지를 깔고 시작하자고 제안했고, 아이는 기쁜 얼굴로 동의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플레이 하우스의 지붕을 색칠하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색칠을 멈추고는 다시 보관 상자에 넣자고 말했다. 부피가 커서 혼자 정리하기 힘들어서, 함께 상자에 넣었다. 정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향했는데, 잠시 후 아이가 또다시 색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방금 넣은 것을 다시 꺼내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막 설거지를 시작하려던 참이라 흐름이 끊기고, 해야 할 일을 멈추게 되니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가 설거지 끝내고 다시 하면 안 될까?”라고 물었지만, 아이는 싫다고 말하며 플레이 하우스를 스스로 꺼내려 했다.


결국 무리하다가 종이가 찢어졌다. 아이는 그 사실을 말하며 속상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찢어진 종이를 본 순간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나중에 꺼내준다고 했잖아. 엄마 말 안 듣더니 결국 찢어졌잖아. 엄마 너무 속상해.”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이에게 향했다.

“엄마, 내 플레이 하우스가 찢어진 건데 왜 엄마가 속상해? 난 괜찮아. 종이니까 테이프로 붙이면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 나는 왜 속상했던 걸까?


찢어진 건 아이의 물건이고, 아이는 괜찮다고 하는데,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감정이 격해졌던 걸까?

나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네 물건이 찢어졌는데 속상하지도 않아?”

그러자 아이는 말했다.

“찢어질 수도 있지. 엄마가 실수할 수 있다고 예전에 말했잖아. 그리고 종이잖아, 붙이면 돼. 그러니까 엄마도 속상해하지 마.”

그 말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속상했던 건 찢어진 종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보니 여러 이유가 떠올랐다.

첫째, 긴 겨울 방학 동안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둘째, 물감이 식탁에 묻는 것에 대한 걱정이 컸다.

셋째, 완벽주의적인 성향 탓에 물건이 손상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찢어진 것을 보고 아이가 상처받을 거라 미리 짐작하고 감정을 대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감정은 철저히 내 것이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아이의 감정을 내 감정과 뒤섞어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할 것이다’, ‘내가 속상하면 아이도 속상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일방적인 감정 투영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 순간 떠오른 강의가 있었다.

오뚝이 선생님이 강조하신 ‘엄마와 아이의 감정 분리’가 실생활 속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의 분리는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아이는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다.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넘어갈 줄 아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아이의 말에서 나는 ‘감정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힘’을 배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내가 감정을 이해하고 배우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작은 사건 속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배운 만큼 보려고 노력하고, 실천하면서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 아이 덕분에, 오늘도 조금 더 나은 나로 자라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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