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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24. 2016

자그레브에서 아침을

크로아티아,그곳에선 아침에 카바를 마셔야 한다.


 이렇게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크로아티아의 첫인상이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공기, 바람, 빛의 무게... 모든 게 희미하지만 은은하게. 그러니까 조금은 추억인 이야기.


 밤 비행기로 자그레브에 도착해 트렘을 타고, 낯선 사람이랑 길을 물을 겸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 두 정거장을 지났다. 그 사람은 코리아에 대해 전혀 몰랐으나 자꾸 이것 저것 묻다가 우리가 내릴 때가 돼서야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이야. 지금 친구들 만나러 가는데 그냥 내키지가 않네. 그래도 가야해. 혼자 있고 싶지만 약속을 했거든."

 가끔은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더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마 그에게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신행 첫 숙박지 Arcotel Allegra Zagreb에 도착했다. 낭만적일 것만 같았던 신혼 여행 첫날밤은 피곤하고 노곤하고 낯설고 조금은 서러웠다. 무덤덤하게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이라기보다 보통 배낭 여행처럼 떠나왔는데 단 하루만에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한 참을 뒤척이다 겨우 조금 잠이 들었었다.






  숙소에서 내려다 보면 기차역이 보인다. 알람보다 먼저 나를 깨운 것은 창가의 빗소리였다. 겨우 밝아 오는 하늘을 보려 창문을 열었다. 비 젖은 공기 냄새가 훅 들어왔다. 빨리 슬로베니아로 가고 싶어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기차역으로 나갔다. 일정상 자그레브는 슬로베니아로 가기 위해 하룻밤 자는 잠깐의 연결 고리였었다.

 오전에 슬로베니아행 기차가 있었다는 미리 다녀온 동료 샘의 말만 믿고 갔었는데, 그 사이 기차 시간이 변경 돼 슬로베니아 첫 기차는 오후 1시경에 있단다. 그렇다면, 짐은 기차역에 보관하고 가볍게 자그레브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시간이 나면 나는 그 나라의 미술관을 가보는 것을 좋아해 일단 자그레브 근대 미술관으로 가기로.



중앙역 맞은 편에 있는 토미슬라브 광장을 지나 부지런히 걸으면 광장 끝, 자그레브 근대 미술관이 나온다. 그런데 들어서자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휴관.


'아...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

여느 여행이랑 다르게 우리의 첫 출발이라는 생각때문에 쉽게 조바심 나고 짜증이 났다. 뭐든 우리의 시작이 잘못되면 어쩌나, 그 전조 현상 인가라는 미묘한 불안 때문이었다. 바보같이 나를 잘 믿지 못하는... 오래된 나쁜 습관.





"이렇다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이동하는 것이 여행자의 기본 자세 아니겠어? 날도 흐린게 딱 기분좋게 걸을 수 있겠어."


 곰보다 둔하던 남편이 손을 이끌며 앞서 갔다. 아마도 나의 미련한 불안을 눈치 채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씀이리라. 그의 단단한 손을 잡으며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혼자 여행이 익숙한 나, 혼자의 생활이 더 편했던 나였지만 순간 둘이 함께하는 여행이라 더 좋구나란 생각이 스쳤다.

 미술관 근처 즈리네바츠 공원의 작고 예쁜 분수를 옆으로 두고 계속 걸어가면서 이 풍경을 가슴에 꼭꼭 세겨두었다. 앞으로 나는 함께하는 삶에 더 익숙해지겠지.



 조금 걷다보니 자그레브의 중심지인 반옐라치치 광장이 나왔다. 반예라라치치 광장은

자그레브 여행의 첫 관문이자 마지막 관문으로 불리는 곳. 실제로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 광장에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까지 계획은 버리고 그냥 발걸음 닿는대로 반나절을 보내자. 꼭 봐야겠다는 조바심을 버리고 편하게 편하게. 내가 너무 여행에 욕심을 냈어.1분 1초가 아깝다고... "



[ 반 예라치치 광장. 버스터미널, 종앙역에서 6번 트램을 타고 하차 가능, 중앙역에서 도보로 약 15-20분 거리]


 광장에서 무화과를 사서 먹으며  광장 어디서든 보이는 자그레브 대성당으로 자연스럽게 걸었다.



성당은 반 예라치치 광장 오른쪽 끝에서 성모마리아상이 보이는 북쪽 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다.



100미터 높이의 고딕 양식의 두 개의 첨탑이 있는 대성당. 성 스테판 성당, 성모승천 대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성당에 조용히 앉아 기도 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다 나도 조용히 기도를 했다.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역, 그 곳의 종교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는 조금 더 맘이 넓어져 많은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만나지 못한 자연과 생명에 대해 그들의 안녕을 묻고 바란다.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아무거나 하자던 우리는 상점들 구경도 하고 서점도 가보고 곧 배가 고파져 손님이 많은 빵집에서 이것 저것 빵을 사서 요기도 했다.

 



  길거리를 하릴없이 걸으며 사람들도 구경하고 풍경도 구경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어떤 곳인지 가보자.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유명한 성마르코 성당이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은 케이블 카를 타는 곳이었다. 그냥 오를 수도 있지만 4쿠나를 주고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하기로. 그라데츠 언덕에 오르니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높은 곳이 주는 근사한 선물 -




그리고 골목을 지나면 -

그 끝에

조금씩 보이는  성마르코 성당.


 애쓰지 않아도 반드시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드러난 알록달록 지붕과 새파란 하늘이 우리를 달리게 만들었다. 달리지 않고서는 이 샘솟는 두근거림을 어찌 할 수 없어서. 마구 달리면서 웃었다.



자그레브 시 문장은 그라데츠 언덕과 성벽을 상징한다.


 내내 흐렸는데 성마르코 성당의 하늘은 거짓말 같이 푸르고 파랬다. 레고처럼, 헨델과 그레텔을 유혹했던 과자집처럼  이쁜 지붕이 햇빛에 반짝였다. 지붕과 하늘은 사이좋은 친구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존재했다.


성당은 1256년에 세워졌지만 타일 지붕은 1880년에 만들어 졌다. 문양 왼쪽은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 달마티아 지방, 슬라보니아 지방을 오른쪽은 자그레브 시를 나타내는 문장이다

 

사람들을 따라 오른쪽으로 주욱 주욱 걸어가다보니 스톤게이트가 나왔다.

13세기에 건설된 문으로 그라데츠 지역을 감싼 문 중 북문.


731년  대화재가 났을 때  성모마리아 그림만이  손상되지 않고 남아 기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기적 앞에서 소원 비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우리도 소원빌자."

"그래."

"뭐라고 소원 빌었어?"

"넌? 너부터."

"우리가 행복하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살게 해달라고."

"나는 오늘처럼 계획대로 안되더라도, 편하게.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살게 해달라고. 간추리자면 행복하자고."


언제나 소원은 평범하다. 건강과 행복. 나만 잘 된다고 행복하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멀리 떠나와도 기도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우리 행복하고 사랑하자. 라는 어색한 청유형을 붙이며 기적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은 기적 앞에서 비범한 행복이 되었다.


1871년 출간된  <금세공장이의 보물>은 귀족 남자와 사랑에 빠진 금세공장이의 딸 도라가 자신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이발사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그 도라를 조각함.


 문 오른쪽 벽에 세워진 여인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깨닫는다. 아, 네가 그토록 아름답다던 도라구나!

 이 도시에는 '자그레브라는 마을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오직 자그레브여인들뿐'이라는 속담이 전해져 온단다.


사실, 세상 그 어떤 여자가 아름답지 않을까.

각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매력을 지닌 여자들. 

서른이 넘으니 예쁜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묻어나오는 그 색깔과 분위기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세월이 주는 선물일까, 만나는 여자 하나하나 꽃이다.




 도라를 보다 고개를 돌렸는데 우연히 2층 테라스에서 웨딩 촬영하는 부부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나와 같이 9월의 신부니 괜히 반가워 가만히 축복을 남기고 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아주 큰 넥나이가 자신의 포지션을 알리고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넥타이. '크로아타' 




그리고 더 내려오면 돌라츠 시장.


우리는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그 곳의 분주함과 소란함을 가만히 느끼며 한바퀴 돌았다. 여느 삶과 다르지 않는 시장의 생기가 돌아 좋았었다.

돌라츠 시장은 오전 7시 부터 문 열어 오후 3시면 파장.


한참을 걷고 놀았는데 아직 기차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이 곳은 노천카페가 많은데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커피 마시는 여유를 즐기기 때문이란다. 우리도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지만 일터에서 하루를 견디고 파이팅하기 위한 전주곡인 경우가 많은데. 생각해보면 거기엔 바쁨 속 티타임의 여유도 포함이니 만만찮게 우리들도 커피마시는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바'라고 불리는 에스프레소 스타일의 커피를 맛볼까나 .

 

너무 썼다.

피곤함이 싹 가셨다.


 먼저 다녀왔던 동료가 자그레브는 볼 게 별로 없어라고 말했었는데 그것이 물리적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관광을 의미한다면 전적으로 동의 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날씨가 좋지 않다고 조바심 냈던 내가 여유를 되찾기 위한 반나절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었던 것 같다. 많이 보려는 마음보다 구석구석 보고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이 여행을 행복하게 마무리 짓도록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자그레브는 결코 볼 게 별로 없는 곳이 아니라 느낄 게 많았던 곳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여행에 많은  것을 보고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안녕, 자그레브.


마지막 날 또 만나. 이 여행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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